[걷다 보니 ‘발품 컨셉’-커피]#부산(13, 끝)
2014년의 일이다. 그해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 KOTRA)가 발간한 ‘벨기에 커피산업 현황’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보면서 ‘아차’ 싶었다.
1년 전 벨기에와 네덜란드 여행 중 반나절만에 후딱 보고 온 안트베르펜(앤트워프)을 떠오르게 해서다. 여행할 때만 해도 안트베르펜은 벨기에의 제2 도시임에도 그저 스쳐 가는 곳에 불과했다. ‘플란다스의 개’와 ‘네로’로 기억되는 장소, 바로크 회화를 대표하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집과 그림이 있는 곳으로만 알았으니 말이다. 덕분에 벨기에 브뤼셀과 브뤼헤를 방문하고 네덜란드 로테르담으로 이동하는 도중 잠깐 열차에서 내려 반나절 정도만 둘러봤다.
코트라 보고서는 그런 안트베르펜을 짧은 시간에 둘러볼 도시가 아니라는 걸 알려줬다. 스스로를 커피 러버라 말해 놓고 안트베르펜을 놓쳤으니, ‘아차’ 싶을 만했다.
그리고 10여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의 안트베르펜처럼 부산에서 다시 한번 '아차' 싶을 뻔했다. 부산은 ‘그냥’ 커피의 도시가 아닌, ‘커피 문화와 경제학을 만들어가는 도시’라는 걸 부산의 카페를 다니며 알게 됐으니 말이다.
벨기에의 커피 사랑은 한국 못지않다. 국제커피산업협회(ICO)에 따르면 2011년 기준 벨기에 커피 총소비량은 약 93만 자루(60㎏ 기준)로 세계 16위를 차지했다.
여기서 눈길을 끌만한 내용은 벨기에가 단순히 커피 소비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두 가공품 등 형태를 불문하고 물량 기준으로 유럽 제2의 커피 재수출국이라는 경제적 효과를 보고 있다는 점이다.
벨기에가 커피 재수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유럽의 대표적 항만인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뒤를 이어 2인자 자리를 유지하는 안트베르펜항 덕이다.
프랑스 해사 컨설팅 기관인 ‘알파라이너(Alphaliner)’에 따르면 2021년 상반기 컨테이너 항만의 전체 물동량 기준으로 로테르담항이 11위로 유럽에선 가장 많은 물동량을 기록했다. 안트베르펜항(14위)이 그 뒤를 이었다. 부산항은 전체 물동량 7위다.
코트라 보고서는 안트베르펜항이 독일 프랑스 등 많은 항만과의 경쟁에도 유럽 제2의 항만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와 전략을 찾았다.
그중 하나가 ‘틈새시장’이다. 로테르담항이 잘하는 컨테이너나 원유 등 액체벌크 대신 혼재화물(Break Bulk) 처리에 집중했다. 그중 하나가 커피다.
코트라 보고서는 벨기에와 안트베르펜항을 이렇게 설명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커피 소비국, 유럽 커피 물류의 중심지로 커피산업 매우 활발.”
실제 유럽으로 들어오는 생두의 50%가 안트베르펜을 거쳐 들어오고 있다. 이를 위해 대규모 저장시설도 갖췄다. 안트베르펜항구는 한 번에 25만톤 이상의 커피를 저장할 수 있는 커피저장고를 갖추고 있다.
벨기에는 안트베르펜항에 들어온 생두를 구축된 창고에 일시 보관한 뒤 그대로 또는 가공해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등 인근 국가로 재수출했다. 네덜란드는 2020년 벨기에 생두 재수출의 55%를 차지했고 프랑스(25%)와 독일(4.1%)이 뒤를 이었다.
유럽커피연맹이 발간한 커피 리포트만 봐도 항구별 커피 저장양에서 안트베르펜항이 압도적이다.
안트베르펜항을 통해 벨기에는 세계 최대 커피 소비지역인 유럽의 커피원료 공급국이자, 커피교역의 관문이 됐다. 여기에 커피 선물거래 관련 뉴욕(ICE), 런던(LIFFE)에서 모두 인증을 받으면서 선물가격 결정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네덜란드 외무부 산하 기관인 개발도상국 수입촉진센터(CBI)도 벨기에의 커피 산업의 잠재력을 눈여겨봤다.
CBI는 ‘벨기에의 커피 시장 잠재력’이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벨기에는) 유럽 커피의 주요 진입 및 무역 허브 중 하나”라며 “지속 가능하고 추적 가능하며 고품질 제품을 선호하는 소비자 추세에 따라 인증 커피에 대해 점점 더 흥미로운 시장이 되고 있다. 벨기에의 스페셜티 커피 시장도 성장하고 있으며, 소규모 커피 하우스와 카페에 대한 국가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유럽 최대의 커피 재수출국의 면모를 면밀히 살펴봤다. 2020년에 24만3000톤의 커피를 재수출한 벨기에는 전체 유럽 생커피 재수출의 45%를 차지했다. 이처럼 벨기에의 커피 재수출량은 2016년부터 2020년까지 평균 7.0% 증가했다.
유럽 커피의 중요한 무역 허브인 안트베르펜항을 설명한 각종 보고서 내용은 부산항을 대입해도 어색하지 않다. 일단 대한민국은 벨기에 못지않게 커피 사랑을 과시하며 커피 시장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
관세청이 2023년 1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22년 10월 커피(생두+원두) 수입액이 첫 10억 달러를 돌파한데 이어 연말까지 연간 최고 수입액(13억 달러)을 기록했다. 수입액은 지난 2019년 6억6000만 달러에서 2020년 7억4000만 달러, 2021년 9억2000만 달러로 급증세를 보이면서 3년 새 거의 두 배 수준 늘었다.
13억 달러는 지난해 금(12억6000만 달러, 세공품 제외) 수입 규모를 웃도는 수준이며 우유와 유제품(15억3000만 달러), 위스키 등 주류(16억2000만)에 근접하는 규모다.
수입량 역시 20만 톤(t)으로 전년 대비 9.5% 증가했다. 우리나라 성인이 4300만 명이라고 보면 1인 기준, 하루 1.3잔의 커피를 소비할 수 있는 양이다. 특히 로스팅하지 않은 생두 수입이 18만 톤으로 전년보다 10% 늘었다.
미국의 글로벌 시장 조사 업체 엑스퍼트마켓리서치(Expert Market Research, 사진)도 한국의 커피 시장이 2018~2022년 약 113억6000만 달러의 가치로 성장했다고 봤다. 그리고 2023년에서 2028년 사이에 9.7%의 연평균성장률(CAGR)을 보일 거라는 전망도 내놨다.
이런 가운데 부산은 단순히 커피 소비를 넘어 커피 문화를 만드는 동시에 커피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지난 4월 부산연구원(BDI)이 부산항 신항 항만배후단지 남컨테이너부두(남컨)에 커피특화단지를 조성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보고서에선 고민의 방향을 살펴볼 수 있다.
BDI 정책보고서 '해외 커피산업 발전 도시의 동향과 부산의 정책과제'에 따르면 부산항 항만배후단지엔 커피 원재료를 수입·가공·유통·수출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 있다.
특히 수입 커피의 93~96% 이상이 유입되는 부산항에는 지난해 기준 원두가 17.1만 톤(금액 기준 8.8억 달러)이 수입돼 전년 대비 11.2%(금액 기준 64.0%)나 증가했다.
보고서를 작성한 장정재 책임연구위원은 "남컨이 1종 항만배후단지로 국내외 제조와 물류 기업을 유치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기에 커피 원두 저장·가공·유통 기업을 대상으로 투자 유치 마케팅을 전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커피산업 육성을 위해 부산 산업생태계를 고려한 커피 제조업 육성, 항만배후단지에 커피 특화단지 조성, 기술 창업 지원 및 관련 기업 유치, 부산 국제 커피엑스포 개최, 부산 커피의 정체성 확립, 공동 창고 및 콜드체인 구축 지원 등을 정책과제로 제안하기도 했다.
부산의 카페들은 이미 개성 강한 스페셜티 브랜드를 통해 커피 재수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선두에 선 곳이 모모스커피다. 유튜브 채널을 보면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며 브랜드 역량을 키우고 있다. 실험 장소는 모모스커피 영도점이다. 1000톤급 미만 소형선박이 접안하는 영도의 물양장(物揚場) 창고를 개조해 만든 공간이다.
이곳엔 생두를 적절한 온도에서 보관하고 볶아서 포장하는 원스톱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최고의 원두를 선보이기 위해 경험과 연구를 결합해 세팅했다.
마대자루에 담겨 온 생두는 원형 탱크 형태의 12개 사일로로 이동해 보관된다. 1톤의 생두를 보관할 수 있는 사일로엔 저울 역할을 하는 4개의 다리가 있다. 정밀하게 측정해 생두를 배출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배출된 생두는 로스팅실로 옮겨진다. 산지와 품종의 개성을 느낄 수 있도록 도입한 3대의 독일 프로밧사 로스터기는 드럼의 크기와 형태에 따라 블랜드 커피, 싱글 커피로 나눠 매일 로스팅하고 있다.
모모스커피는 단순히 고가의 장비를 설치한 데 그친 게 아니다. 로스터와 바리스타가 행복하게 커피를 볶고 추출하도록 배려했다. 대표적인 게 마대자루로 들어온 생두가 사일로와 로스터기로 이동하는 데 사용되는 투명한 관이다.
모모스커피는 “생두가 담긴 마대 한 자루는 70kg에 달하는 데 매번 이를 옮기고 계량해야 하는 로스터들은 매일 중노동의 환경에 놓여 있다. 로스터들이 체력적으로 지치지 않고 커피에 집중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이 관은 생두의 손상을 줄이도록 디스크 컨베이어 벨트 방식을 도입했다.
볶은 원두가 마지막으로 가는 곳은 포장실이다. 스페셜티 확산을 위한 드립백을 생산하고 원두의 최종 상품을 만든다.
모모스커피뿐만 아니다. 부산에선 원두에 진심인 소규모 로스터리 카페들도 만날 수 있다. 대표적인 곳이 히떼와 트레져스다.
히떼는 이름에서 정체성을 눈치챌 수 있다. 북유럽의 숲 속이나 호숫가에 있는 오두막 집을 의미한다. 호주와 북유럽 등에서 오랜 시간 여행한 로스터 정효재, 바리스타 최희윤 부부가 다양한 풍미와 깊은 단맛을 내는 노르딕 라이트 로스팅 커피를 선보이고 있다.
트레져스는 보기 힘든 다양한 품종, 원산지와 가공방식이 다른 커피로 커피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부산이 커피의 재수출 가능성만 보여준 게 아니다. 지역 경제에도 긍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일명 ‘카페거리’를 통해 쇠락한 지역이 살아나는 경험을 했다.
부산학연구센터가 2022년 12월 발간한 ‘커피 바다, 부산’에 따르면 부산의 대표적인 카페거리로는 전포카페거리, 온천천 카페거리, 해리단길, 영도커피특화거리 등이 있다.
전포카페거리는 공구상가와 기계부품 상가가 다른 지역으로 가면서 슬럼화가 진행되던 곳이다.
이곳에 2010년부터 젊은 창업자들이 개성있는 카페를 열기 시작하더니 2011년 ‘서면카페골목’이라는 명칭이 등장했다. ‘전포카페거리’라는 명칭은 2013년부터 사용됐다.
2017년부터는 매년 전포카페거리 커피 축제를 열었다. 뉴욕타임스는 2017년 ‘가봐야 할 세계 명소 52곳(52 Places to Go in 2017) 중 하나로 전포카페거리를 선정했다.
온천천 카페거리는 생활하수와 공장폐수의 유입으로 악취가 진동하던 온천천 지역에 있다. 1995년 온천천 살리기 운동이 시작된 후 2011년 주택을 개조한 작은 카페가 문을 열더니 10년이 지난 현재 하루 1만여 명이 찾는 지역으로 변모했다.
해운대구 우동 옛 해운대 역사 뒤쪽에 위치한 해리단길과 수영구 망미동 망미번영로 일대 망미단길 역시 부산의 개성 있는 카페와 식당이 있는 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영도는 말 그대로 ‘커피섬’이 됐다. 특히 복합예술문화공간의 형태로 봉래동·청학동과 대평동(깡깡이 예술마을) 등에 자리했다. 봉래동의 ‘무명일기’와 수영장을 카페로 개조한 ‘젬스톤’, 청학동의 신기잡화점(신기산업)이 대표적이다. 영도구 봉래동 물양장 거리는 부산을 대표하는 커피특화거리로 거듭날 예정이다.
물론 카페거리가 생기면서 예기치 않은 부작용도 발생했다. 젠트리피케이션이다. 전포카페거리가 기존의 전포성당 주변에서 최근 부산진소방서가 있는 공구상가 일대와 전포대로를 건너 전포1동 주민센터 인근까지 반경을 넓힌 이유도 높아진 임대료 때문이라는 이유가 있다.
최근 전포카페거리와 전리단길 동쪽에 있는 전포사잇길은 2014~2015년 3.3㎡당 1000만원이던 것이 2019년 2000만원으로 두 배 가량 뛰었고 현재는 4600만원 내외로 4배 이상 올랐다.
*메인 사진 출처 : 픽사베이, 모모스커피 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