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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중담 Feb 12. 2024

글러먹지 않은 배움을 위하여

남명 조식 <을묘사직소>

그리고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글렀으며, 나라의 근본은 이미 망했습니다. 하늘의 뜻은 이미 떠났고 백성의 마음은 이미 흩어졌습니다. 비유하자면 큰 나무를 백 년 동안 벌레가 파먹어 진액이 다 말라 버렸는데 거센 비바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지경에 이른 지 오래입니다. 조정에 있는 사람 중에 충성스럽고 뜻있는 신하와 밤낮으로 부지런한 선비가 없지 않으나, 이미 형세가 극에 달하여 지탱할 수 없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쓸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낮은 관원들은 아래에서 시시덕거리며 주색을 즐기고, 높은 관원들은 위에서 데면데면하게 재물만 늘리고 있습니다. 물고기의 배가 썩고 있는 지경인데도 바로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조정에 있는 신하는 용이 연못에 도사리듯 도와줄 당파를 끌어 모으고, 지방에 있는 신하는 이리가 들판을 마음대로 누비듯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데, 가죽이 없어지면 털이 붙을 곳이 없다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자전(임금의 어머니)께서는 생각이 깊으시나 깊은 궁중의 한낱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께서는 어리시니 선왕께서 남기신 일개 고아일 뿐입니다... 평소 조정에서 재물로 사람을 등용하므로 재물은 모였지만 백성은 흩어졌습니다... 마음속에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온갖 잡념을 제거하는 계기는 나에게 달려 있을 따름인데, 전하께서 종사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루아침에 퍼뜩 깨달아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신다면 홀연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도리를 터득할 것입니다... 훗날 전하께서 왕도 정치의 교화를 이루신다면 신은 하인들 사이에서 채찍을 잡고 마음과 힘을 다해 신하의 직분을 다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바로잡아 백성을 새롭게 하는 주안점으로 삼으시고... 임금이 임금답지 않으면 나라가 나라답지 않으니...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주 1).


"전하께서 종사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라 예의와 격식을 차려 한 말이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당신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요?" 임금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뿐만 아니라, 임금의 어머니에게는 과부라고, 임금에게는 고아라고 말하다니. 진짜 목숨을 내놓지 않으면 이런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식은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라고 말합니다.


덕천서원

예전 문화유산 기행을 다닐 때, 남명 조식 유적지를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경상 좌도에 (퇴계) 이황이 있다면, 경상 우도에는 (남명) 조식이 있다'라고 말할 만큼, 조식의 사상과 학덕은 유명했습니다. 조식 선생은 명종과 선조에게 많은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한 번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제자를 기르는 데 힘썼습니다. 현실 정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지 않았는데, 그중 ‘단성소’라 불리는 ‘을묘사직소’는 유명합니다. 조식의 상소대로 명종과 선조 시대의 조정은 부패했고, 썩을 대로 썩어있었습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임진왜란'입니다.

그런데 그 대가를 왜 죄 없는 백성이 치러야만 하는 것일까요? 예나 지금이나 이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는 왜 그렇게 한결같은지 모르겠습니다.


이 글은 그 유명한 '단성소'의 일부입니다.

내용 중에 문정왕후를 과부, 명종을 고아라고 칭하였는데, 명종은 이를 보고 노발대발하여 조식을 엄벌에 처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조정 신하들의 만류로 무사하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조식 선생은 학문과 덕을 깨끗이 닦은 사람이었고, 높은 기개와 기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황은 그를 일컬어 "사람됨이 우뚝 솟아 속세를 벗어났고 희고 맑은 성품이 세상 밖에 있을 정도로 높고 멀다(주 2)."라고 하였습니다.


단성소

조식 선생은 공허한 이론과 사상을 지양하고 현실 문제에 직접 관여하는 학문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리학뿐만 아니라 현실 문제와 직접 관련된 잡학(雜學)에 관심을 갖고, 현실생활의 개선을 위해 힘을 썼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식의 문하에서 공부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몸소 앞장서 싸움에 참여하였습니다.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곽재우도 조식 선생의 문하생이었습니다.


당시 유적지를 방문했을 때 겪은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서울대 대학원에서 인문 기행을 온 팀이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뜨거운 여름날이었는데, 그때는 학구열에 불타고 있었기 때문에 '잘 됐다' 싶은 마음에 졸졸 따라다니며 해설을 듣게 되었습니다. 해설사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 보니, 도무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을 만큼 추상적이고 모호하였습니다.

 '내가 이해력이 떨어지는 건가?'

살짝 의구심이 들어 다른 분들의 표정을 살펴보았습니다.

'똑똑한 서울대 대학원생들이면 어떻게 알아들을까?'

그런데 그들의 표정에도 당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불평과 짜증이 묻어있었습니다. 해설사는 16년 간 닦아온 기량을 엘리트들 앞에서 한껏 펼칠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하지만 핵심을 정확하게 집어내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낀 계기가 되었습니다.


현실에 도움이 되지 않는 배움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아무리 많은 정보와 지식을 얻는다 한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 아닐까요? 엘리트라 하는 사람들이 높은 곳에 앉아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과연 배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득 조식 선생과 같은 사람이 그리워집니다.




주 1) 조식 외, <한국 산문선 3>, 2017, 민음사

주 2)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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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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