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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중담 Feb 29. 2024

가르쳐 줄 수 있다면
'묘'랄 것이 없지요

남구만 <조설(釣說)>

하루는 이웃 사람이 대나무 하나를 자르고 바늘을 두드려 낚시를 하라며 내게 주면서 물결 사이에 낚싯줄을 드리우게 했다...이튿날 한 손님이 왔다가 낚싯바늘을 보더니 말했다. “고기를 못 잡는 것이 당연합니다. 낚싯바늘 끝이 너무 굽은 채 안으로 향해 있어서, 물고기가 삼키기 쉽지만 내뱉기도 어렵지 않습니다”...“고기를 못 잡는 것이 당연합니다. 낚싯바늘의 끝이 밖을 향하고는 있지만 굽은 테두리가 너무 넓어 물고기의 입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낚싯바늘을 눌러 굽힐 때는 반드시 굽은 부분의 끝을 짧게 해서 밥알을 겨우 끼울 정도로 해야 합니다.”...“저 손님의 말이 낚싯바늘에는 맞는 말이지만 당기는 법을 빠뜨렸습니다.”...손님이 말했다. “법은 이것이 전부지만 묘가 아직 남았습니다.”...바뀐 것은 다만 낚싯대를 잡은 손뿐이었다...내가 말했다. “묘가 이 정도란 말인가! 이것도 내게 가르쳐 줄 수 있는가?” 손님이 말했다.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법입니다. 묘를 어찌 가르쳐 줄 수 있겠습니까? 만약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이른바 묘랄 것이 없겠지요. 굳이 말하시라면 한 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당신이 내 방법에 따라 아침에도 드리우고 저녁에도 드리워 정신을 집중하고 뜻을 쌓아서 날이 쌓이고 달이 오래되어 익혀 습성을 이루면 손이 알아서 움직이고 마음이 절로 터득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혹 터득할 수도 있고 터득하지 못할 수도 있으며, 은미한 것까지 통달하여 지극한 묘리를 다할 수도 있고, 그 가운데 한 가지만 깨닫고 나머지 두세 가지는 모를 수도 있으며, 하나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스스로 미혹될 수도 있고, 문득 깨닫고도 깨닫게 된 이유를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당신에게 달려 있으니, 제가 어찌 간여하겠습니까(주 1)?”


저는 낚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낚시의 '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동네 형들과 연못으로 개울로 붕어를 잡으러 갈 때도, 아버지와 동생과 망둥어 낚시를 갔을 때도, 저는 별다른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미끼를 문 고기를 낚아챌 때의 묵직한 느낌이 좋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낚시에 빠져들 만큼의 매력을 주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남구만 초상 / 출처 : 네이버 이미지

이 글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문장가였던 남구만의 것입니다. 교과서에 실린 유명한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의 작자이기도 한 그는, 효종 시대에 관직에 올라 숙종 시대에 영의정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문장에도 뛰어났고, 기행문과 역사에 대한 고증도 많이 남겼으며, 시서화에 고루 뛰어났던 인물입니다(주 2).


이 글은 1670년, 그가 결성(지금의 충남 홍성)에 돌아와 농사를 지을 때 지었던 작품으로, 집 뒤 연못에서 낚시를 배우게 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남구만은 낚시를 배우는 것이 학문을 하고 깨달음을 얻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크게 깨우치고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글의 요지는

'법은 배울 수 있지만, 묘는 배울 수 없고 오직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자기 계발 서적들이 있지만, 그중 저자처럼 성공을 일구어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자신의 책을 읽은 사람 중에 3%도 안 되는 사람만이 나와 같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소위 성공하는 '법'을 잘 가르쳐주고 있는데, 왜 그 '법'을 익히는 사람들은 똑같이 성공하지 못할까요? 혹 상업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얕은 술수로 책을 쓸 수도 있겠지만,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그 가치를 인정받은 책에서조차 도움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법'은 배웠을지 모르지만, '묘'는 깨우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낚싯바늘을 제대로 만드는 '법'을 배울 수는 있습니다.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을 때, 제대로 당기는 법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낚싯대를 드리우고 당기는 '손'만은 배울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 동안 갈고닦아온 '묘'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내 방법에 따라 아침에도 드리우고 저녁에도 드리워 정신을 집중하고 뜻을 쌓아서 날이 쌓이고 달이 오래되어 습성을 이루면 손이 알아서 움직이고 마음이 절로 터득하게 됩니다.


묘를 터득하는 유일한 방법은, '법'에 따라 아침에도 저녁에도 정신을 집중하고 뜻을 쌓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날이 쌓이고 달이 쌓여 마침내 습관이 되고, 저절로 알아서 움직이고 저절로 터득하는 것입니다. 학문을 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법'을 배워 쉬지 않고 행하고, 집중하여 쌓고, 습관으로 만들어 마침내 저절로 터득하게 되는 것.


그런데 손님은 또 한 가지를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혹 터득할 수도 있고 터득하지 못할 수도 있으며, 은미한 것까지 통달하여 지극한 묘미를 다할 수도 있고, 그 가운데 한 가지만 깨닫고 나머지 두세 가지는 모를 수도 있으며, 하나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스스로 미혹될 수도 있고, 문득 깨닫고도 깨닫게 된 이유를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당신에게 달려 있으니, 제가 어찌 간여하겠습니까?


학문하는 어려움, 글쓰기의 어려움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행하여도 누구는 한 가지만 터득할 수도, 혹은 터득하고도 모를 수도, 은미한 것까지도 통달하여 지극한 묘미를 깨달을 수도, 심지어 어떤 사람은 스스로 미혹될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엄정한 사실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천, 만권의 책을 읽고도 지극한 뜻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고, 스스로 미혹되어 잘못 깨달을 수도 있으니 말이지요.


그러니 무엇을 하든, 미혹되어 잘못된 방향으로 갈까, 심신이 어그러질까 항상 경계할 일입니다.




주 1) 김창협 외, <한국 산문선 5>, 2017, 민음사

주 2) 출처 : 남구만(南九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 월, 목 - <문장의 힘!>

⁕ 화, 금 - <거장에게 듣는 지혜>

⁕ 수, 일 - <사소한 일상은 인생의 최종손익결산>


월요일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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