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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중담 Feb 26. 2024

근심은 자신을 모르는 데 있다

이천보 <자지암기(自知菴記)>

사람의 근심은 남을 모르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을 모르는 데 있다. 오직 자신을 알지 못하므로 남이 기리면 기뻐하고 남이 헐뜯으면 슬퍼한다. 대저 천하의 색은 내가 내 눈으로 보기에 남의 눈을 빌리지 않는다. 천하의 소리는 내가 내 귀로 직접 들어 남의 귀를 통하지 않는다. 이제 내 눈을 감아 남이 본 것에서 찾고 내 귀를 닫아 남이 들은 것에서 구하니 이것이 대체 무슨 이치인가? 소리와 색깔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고 들은 것은 그 가늠이 내게 달려 있지 남에게 달려 있지 않다. 하물며 내가 나를 몰라서 쩔쩔매며 남의 입만 올려다본다면 어찌 병통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옛날의 군자는 홀로 서서 굽히지 않았다. 어지러이 남들이 취하여 높여도 더 나대지 않았고 갑작스레 남에게 버려져도 더 위축됨이 없었다. 스스로를 너무나 잘 알았기에 내가 나 되는 것이 어느 경우든 한결같았다(주 1).


이천보 / 출처 : 네이버 이미지

이 글은 조선 후기의 문인이었던 이천보의 문장입니다. 그는 영조시대 이조판서, 병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의 자리를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다가, 사도세자의 '평양 원유 사건'으로 인해 음독자결한 인물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말재주가 좋았는데, 담론을 즐겼고 시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주 2).


이 문장은 그의 벗이었던 유언길이 지은 암자에 붙인 기문(주 3)입니다. 암자에 '스스로를 안다'는 뜻의 '자지(自知)'라는 이름을 붙이고, 과거의 명성을 내던진 채 바닷가에 은거한 삶을 칭송한 글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기 자신을 아는 것만큼 중요한 철학적 주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만큼 힘든 주제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생기는 거의 모든 문제들의 원인을 따져 들어가 본다면, 아마도 사람들이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두 가지 방향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내적 지향성을 가진 앎이고, 다른 하나는 외적 방향성을 지닌 앎입니다.

전자는 자신이 부족하고 결함이 많은 인간이라는 것,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아는 앎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겸손'이라는 덕목으로, '어느 누구에게나 배우겠다'는 자세로 연결됩니다.


만일 어떤 자가 자기보다 못한 것만 내려다보며 자기 학식에 도취한다면, 그에게 지나간 시대로 향해서 눈을 위로 돌려보게 할 일이다. 그는 거기 자기는 그 발밑에도 못 따를 사람들을 몇천 명이라도 발견하고는 뿔을 숙일 것이다. 그가 자기 용기에 으쓱해지며, 잘난 체하고 싶어지거든 저 두 스피키오나, 많은 군인들이나 국민들의 생애를 회상해 볼 일이다. 그는 감히 그들 뒤를 따를 생각도 못낼 것이다(주 4).


그리고 외적 방향성을 가진 앎은, 자신이 실제 지니고 있는 자질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세상에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앎입니다. 몽테뉴는 이것을 위해 자신의 내면을 깊이 탐구하고, 판단력의 날을 날카롭게 세워 양심적으로 평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만일 내가 내게 좋거나 현명하거나 또는 그런 것에 가깝게 보인다면, 나는 힘껏 소리 높여서 내 말을 하겠다. 실제 있는 것보다 더 못하게 말하는 것은 어리석음이지, 겸손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자기 가치보다 못한 짓을 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고 겁쟁이의 짓이다. (중략) 실제보다 더하게 자기를 말하는 것은 언제나 교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 역시 어리석음에서 나온다(주 5).



더 하지도 않고, 덜 하지도 않게 자신을 정확하게 판단하려는 노력과 자세, 몽테뉴는 그렇게 자신에 대해 연구하였고, 자기의 생각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판단력의 날을 날카롭게 갈아 예리하게 자신을 들여다봐야 하는 걸까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자면, '자기 가치'에 해당하는 몫을 잘 해내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람에게는 고유한 자기만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 가치보다 못한 삶을 살지도 말 일이며, 또 그것을 벗어나는 삶을 살아서도 안 된다는 말이 아닐까요? 이것을 '주제넘게 살지 말라'는 말로 호도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다만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나왔을 때, 고유하게 주어진 가치가 있으며, 그것을 가지고 세상에 기여할 사명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 의미라는 것도, 목적도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자기 가치라는 것 또한 상상력으로 빚어낸 허황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 우주의 심오한 비밀이 밝혀지지도 않은 마당에 그렇게 섣불리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현대인은 가장 근원적인 앎을 잊고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근심은 남을 모르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을 모르는 데 있다. 오직 자신을 알지 못하므로 남이 기리면 기뻐하고 남이 헐뜯으면 슬퍼한다.




주 1) 이천보 외, < 한국 산문선 6 >, 2017, 민음사

주 2) 출처 : 이천보(李天輔)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주 3) 기문 : 하나의 건물이 창건되거나 크게 수리를 할 때 그 내력과 뜻을 밝혀두는 글.

주 4, 5) 몽테뉴, <몽테뉴 나는 무엇을 아는가>, 2005, 동서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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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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