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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중담 Dec 29. 2023

나는 '말뚝 대가리', 앵무새인가?

몽테뉴 <몽테뉴 나는 무엇을 아는가>

글을 읽다 보면, 정말 갖고 싶어지는 문구들이 있다.


'훌륭하고 무서운 시련, 약자들은 거기서 비루해져서 나오고 강자들은 거기서 숭고해져서 나온다.'

'웃음은 사랑니처럼 나중에 오는 거야. 죽음과 격렬하게 싸운 후에야 비로소 자신을 향해 웃을 수 있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등등...


수많은 문장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들은 가장 어려운 순간에 나와 함께 해준 고마운 벗들이다. 첫 번째는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둘째는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 세 번째는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만난 것이다.


나는 빅토르 위고와 존 스타인벡의 격려를 받으며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견뎌낼 힘을 얻었고, 정조시대의 문인 유한준의 가르침을 새기며 어려움 속에서도 배우려는 의지를 잃지 않았다. 이렇게 삶으로 배운 문장들은 몸과 하나가 되어  '내 것'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언제든 내 경험과 매칭되어 나의 언어로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 삶에 적용되지 못한 문구들은 그저 머릿속 어딘가에 켜켜이 쌓여있을 뿐, '내 것'이 되지 못한다.




예전 세미나를 다니며 배울 때였다. 매주 수요일에 하는 강의는 오전 9시에 시작되어 저녁 5시가 되면 끝이 났다. 2박 3일 세미나를 할 때는, 아침 9부터 시작한 강의가 밤 11시, 어떤 때는 12시가 되어서야 끝나기도 했다. 식사시간과 중간중간 쉬는 시간 10분을 제외하고도, 11시간이 넘는 강의를 하는 것이다. 참 대단한 지식량과 말발이다. 사람들은 노트북을 가지고 앉아서 하나라도 놓칠세라 '타다다다닥' 키보드를 불꽃 연타하고, 질문하는 시간이 아까워 하나라도 더 말해 달라고 강사에게 요청한다.


나는 펜을 들고 노트에 필기해 가며 따라가는데, 중간중간 질문이 많이 생긴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이용해 질문해 보기도 하지만, 워낙 낯을 가리는 분이라 그것도 망설여진다. 결국 많은 질문들이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제풀에 지쳐서 사라져 버리고 만다.


열성적으로 따르는 분들과 얘기를 하다 보면,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을 자주 경험했다. 강사가 했던 말을 그대로 받아 되뇌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 강사의 말로 하지 마시고 선생님의 말로 하세요."

나는 강사의 말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해서 자기의 것으로 소화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생각했다. 들려오는 얘기로는, 세미나에서 들은 말들을 현장에서 직접 적용한 후, 공동체에 문제가 생기고 다툼과 분열이 일어난다고 한다.

왜 그럴까?

원론적인 말을 삶의 현장에 직접 적용할 수 있을 만큼 소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질문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어디서도 듣지 못했던 새로운 생각과 해석, 해박한 지식과 경험에 압도되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마치 자신의 능력인 듯, 지식인 듯, 해석인 듯, 경험인 듯 말하고 있으니,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기억력을 채울 생각만 하고, 이해력과 양심은 빈 채로 둔다. 마치 새들이 모이를 찾으러 나가서 그 모이를 새끼에게 먹이려고 맛보지 않고 입에 물어 오는 것과 똑같이, 우리 학자님들은 여러 책에서 학문을 쪼아다가 입술 끝에만 얹어 주고, 뱉어서 바람에 날려 보내는 짓밖에는 하지 않는다(주 1).


몽테뉴의 이 말이 얼마나 마음에 사무치는지!

내 머리를 화려한 문장과 수사, 이름 높은 사람들의 지식과 지혜로 채운 다음, 마치 제 것이 된 양, 존재의 수준이 한 차원 높아진 양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고 삶으로 체화시키지 않으면, 먹이를 먹고도 입에만 담아두고, 그것을 다시 남에게 전해주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위 속에 집어넣고 소화를 시켜야 에너지가 생기고, 피와 살이 되어 몸을 건강하게 만들 것이 아닌가?

몽테뉴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말뚝 대가(주 2)'라며 혹평하고 있다.

'혹시 나도 이런 사람이 아니었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몽테뉴는 남에게 말하는 법을 배우지 말고, 자신에게 말하는 법을 배우라고 한다.

남들에게 유식하고 현명하고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자랑하기 위해 지식을 쌓지 말고, 오직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여 자신을 변화시키고 그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이다.


우리는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플라톤의 도덕이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라는 식으로 말할 줄 안다. 그러나 우리 자신으로는 뭐라고 말하나? 우리는 어떻게 판단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 앵무새도 이만큼은 할 것이다(주 3).


앵무새가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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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2, 3) 몽테뉴, <몽테뉴 나는 무엇을 아는가>, 2005, 동서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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