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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밤 Oct 10. 2023

파리1, 비오는 파리를 볼 수 있다니

바쁜 일상이 영화같은 여행이 되는 곳

생각보다 비행기가 지연됐다. 


원래 계획이라면 6시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짐을 찾고 시내로 바로 가서 동행을 만나 8시 바토무슈(센강 유람선)을 탈 계획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역시 보란듯이 깨지라고 있는법이다. 늦어진 비행 도착 시간 때문에 짐을 찾아 겨우 공항 밖으로 나온시간이 저녁 8시였다. 동행들에게는 비행기 연착으로 나중에 합류하겠다고 전달하고 시내로 갈 방법을 찾았다. 지하철을 탈 수도 있지만 이래저래 무거운 짐을 옮겨 다니기 쉽지 않을 것 같아서 공항 리무진을 이용했다. 마침 티켓 발권기가 고장이라 ATM기에서 현금을 인출하고 버스 기사에게 직접 티켓을 구매했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유로화가 낯설었지만 빳빳한 유로화를 만지니 이제야 유럽에 온것이 실감이 났다. 버스에 타서 무뚝뚝한 표정의 기사에게 돈을 건네고 티켓을 받았다. 그리고 마치 매일 이곳의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아 시내로 향했다. 


리무진을 한시간여정도 타고 오페라 광장에 도착했다. 예전에 왔던 파리 여행의 시작점도 이 오페라 광장이었는데 하며 아주 잠시 추억이 잠기고는 이내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묵을 숙소는 여기서 한정거장 떨어진 에뚜알, 개선문이 있는 곳이다. 



나름 익숙한척 지하철을 타고 에뚜알 역에 도착했다. 역에서 나오니 바로 보이는 호텔, 스플렌디드 에뚜알 나름 4성급이 좋은 호텔이다. 다른 도시의 숙소는 모두 북적북적한 호스텔로 잡았음에도, 파리에서만은 호텔을 잡았다. 파리를 가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여행계획이라 그런지 개선문이 보이는 테라스가 있는 호텔을 예약했다. 방이 굉장히 좋았다. 테라스만 나가면 웅장한 개선문이 보인다. 너무 좋고 파리의 진수를 맛보는 것 같아 굉장히 행복했지만 순긴 괜시리 우울하기도 했다. 사랑했던 사람과 함께 오기로 했던 파리 그리고 그 중심 넓은 호텔에 나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느낌이었다. 나는 이렇게나 감성적이고 외로움을 잘탄다. 파리에 왔다는 것이 너무도 행복하고 좋다가도 뭔가 혼자 남겨졌다라는 생각이 들면 금새 우울감에 빠지기도 한다. 파리가 나한테 이런 느낌을 줄 것을 예상은 했기에 도착 하자마자 조금 바쁜 일정을 잡은 걸지도 모르겠다. 



동행 일행들은 이미 유람선에서 내려서 근처 펍으로 향한다고 한다. 주소를 찍어줘서 나도 바로 거기로 가기로했다. 찍어 준곳은 지하철로 두정거장 정도 떨어진 퐁피두 센터 앞에 있는 식당이었다. 금새 파리에 적응했다. 매일 다니던 길처럼 지하철을 뛰어 내려가 식당 근처에 있는 역으로 향했다. 그런데 퐁피두역에 도착해서 역밖으로 나가려하니 갑자기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듯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국이었으면 금새 짜증이 올라왔을 법도 한데, 아무래도 내가 파리에 온건 맞나보다. 쏟아지는 비를 보면서 


“비오는 파리의 거리를 볼 수 있다니, 정말 행운이야” 


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여행이 주는 긍정의 힘 덕분일까, 파리가 주는 아름다움 덕분일까. 또한 다행히 호텔에서 나올 때 조금씩 비가 뿌리기 시작해서 우산을 챙기고 슬리퍼를 신고 나왔다 그러니 딱히 기분 나쁠것도 없었다. 그래서 딱히 망설이지 않고 폭우를 뚫고 식당으로 향했다. 



만나기로 한 식당안에는 외국인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눈에 띄는 한국인 무리가 있었다. 여자 둘에 남자 둘 총 네명의 한국인이었다.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보니 만나기로 한 동행이 맞다고 한다. 그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음식은 미리 시켜두었다고 하기에 내가 마실 화이트 와인 한잔을 추가로 주문했다.  이미 몇시간정도를 같이 보낸 그들은 꽤나 친해져 있었다. 몇시간 정도면 굉장히 짧게 느껴질 수 있지만 타지에서의 몇시간은 한국에서의 몇일과도 맞먹는 시간이다. 


한두시간정도 이야기를 하며 밥을 먹다보니 다들 조금은 피곤한 기색이었다. 나도 이제 비행기에서 내려 와인 두잔을 마시니 벌써 부터 몸이 노곤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한 남자애가 나에게 따로 카톡으로 언질을 주었다. 무리중에 한 남자와 여자가 분위기상 썸을 타는 거 같다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어느정도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좋겠다 이야기했다. 역시 사랑이 넘치는 유럽인가?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남녀 한쌍을 식당에 남겨두고 각자 숙소로 향했다. 정신없이 도착한 파리에서 만난 첫날의 인연들이라 그리 강한 인상이 남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너무 조용하지않은 여행의 시작을 맞이 할 수 있었다.


호텔로 돌아오는길 이대로 잠들기는 아쉬워 개선문 주변을 한바퀴 돌았다. 그리고 개선문을 돌아 지나는 차들을 바라보았다. 파리도 서울과 다르지 않게 바쁘게 돌아가는 곳이다. 이들의 바쁜 일상이 내게는 되려 영화같은 여행이 되어주는 것이 신기했다. 또 와인 한잔에 이렇게 감성에 차오르는 것을 보니 잘 때가 되었구나 싶었다.




무계획의 둘째날이 밝았다. 아니 아직 밝지 않았다. 아직 시간은 새벽 다섯시도 되지 않았다. 어제 밤 시차적응 실패로 10시 정도의 이른 시간에 잠이 들었기 때문일까 아직 한국이라면 한창 일하고 있을 시간이다. 그래서 눈이 반짝반짝 떠졌고 다시 잠이 오지도 않았다. 한국에 있었으면 하루 컨디션이 뒤죽박죽 될 것이 두려워 어떻게든 눈을 감고 참을 청하려고 노력했을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구지 그럴 필요가 있나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은 일찍 깨어있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잠을 자지 않는다고 한들 한국에서처럼 누워서 유튜브 쇼츠, 인스타그램을 무미건조하게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느꼈다. 그래서 나는 여행만 오면 이상하게 하게되는 것을 해보기로 했다. 바로 조깅이다.



개선문 근처를 숙소로 잡길 참 잘했다. 숙소 밖을 나올때마다 마주하는 개선문이 매순간 내가 파리에 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새벽 여섯시, 아침 해가 온전히 뜨기전의 파리는 희붐하게 파랬다. 푸른색으로 뒤덮힌 파리, 이 도시가 짓는 또 다른 표정이었다. 개선문부터 에펠탑까지는 도보로 약 30분정도 걸린다. 천천히 둘러보면서 조깅을 하고오면 딱 한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로 아침 운동으론 제격이다. 슬금슬금 뛰기 시작했지만 자꾸만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뛰고 있는 곳이 파리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어느 골목을 들어서든 반겨주는 회색의 유럽 건물들, 그리고  슬금슬금 따뜻한 불을 켜고 문을 여는 가게들, 그리고 기지개를 피듯 들어서는 테라스 자리 의자와 테이블들, 그리고 거리를 온전히 파리로 만들어주는 조경잘된 가로수들 까지 모두 함께 "이곳은 파리입니다." 라며 합창 하고 있었다.



뛰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1분정도 뛰고 나서 나를 잡는 광경에 계속 카메라를 켜기 바빴다. 그렇게 정신없이 카메라를 켜서 사진과 영상을 담던 중 누군가 나의 어깨를 툭툭쳤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얼굴에 가득 피곤을 머금고 정장과 서류가방을 든 프랑스 남자가 서있었다. 그리고 내게 장난스러운 핀잔을 건넸다. 


“너 지금 너무 길 중간에 서있잖아.”


살짝 웃으며 핀잔을 슬쩍 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그리고 아주 쿨하게 가던 길을 재촉했다. 물론 나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건넨 진지한 충고일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텁텁한 출근길과 대비되는 여행객의 신남에 가벼운 핀잔을 던져주고 일상의 작은 변주를 얻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분명 그는 웃으면서 핀잔을 던졌으니 말이다!) 그의 핀잔에 잠시 잊고 있었던 나의 목적을 깨달았다. 그리고 카메라는 잠시 넣어두고 파리의 풍경을 눈으로 담으면서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뛰었다. 조금 뛰다보니 뭔가 익숙한 거리가 눈에 걸렸다. 나는 굉장히 공간을 잘 기억하는 편이라 한번 갔던 곳은 잘잊지 않는다. 왠지 에펠탑이 잘보이는 한 골목이 너무 눈에 익어 생각을 해보니 6년전 아빠와 함께 파리를 왔을 때 묵었던 숙소가 있었던 골목이었다. 근처에는 지하철역이 있었고 숙소에서 나와 골목을 돌기만 하면 에펠탑이 보이는 곳이었다. 잔잔한 추억이 떠올라 즐거운 마음은 한층 더 즐거워졌다.



그렇게 길을 따라 뛰던 중 또한 참을 수 없는 유혹이 나를 당겼다. 바로 크루아상과 커피이다. 물론 시간을 내어 맛집을 찾아 가는 것도 좋겠지만 프랑스의 장점은 어느 집을 들어가도 맛있는 크루아상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출근하는 파리지앵들이 들어가 커피 한잔과 빵 하나를 들고 나오는 작은 빵집에 들어갔다. 관광객이 익숙하지 않은 주인은 무뚝뚝해보였다. 거기서 나는 담백하게 커피 한 잔과 크루아상 하나를 시켰다. 여기서 커피는 곧 에스프레소를 뜻하는 듯 했다. 유럽에서 마시는 에스프레소는 늘 옳다. 커피와 크루아상이 담긴 쟁반을 받아들고 가게 앞 작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크루아상 한입, 진한 커피 한모금, 해가 뜨기전 쌀쌀한 날씨 그리고 파리의 거리. 여행을 시작하고 가장 행복한 순간을 꼽는다면 이 순간이 그중 하나가 될것이다. 파리의 관광객이 되기 보다 파리의 일상을 경험한다는 것이 내게는 더욱 힐링이었고 소중한 순간이었다. 한국에서라면 절대 먹지 않은 에스프레소 이지만 여기에 초콜렛이 들어 있는 건가 라고 생각할 정도로 짙은 달콤함이 느껴졌다. 크루아상은 버터의 향이 역시나 향긋했고 크루아상의 겉껍질은 바삭했다. 크루아상을 씹으니 눈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아주 내린지 얼마 안된 눈을 밟는 소리같았다. 속살은 치즈처럼 쫀득하고 촉촉했다.


기분좋은 급작스러운 아침식사를 마치고 에펠탑으로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든든히 배를 채우고 이제는 제법 밝아진 파리의 아침길을 걸었다. 몇년전에 온 파리이지만 에펠탑 가는 길은 이제 익숙하다. 구글맵을 꺼두고 익숙한 길을 따라 신호등을 건넜다. 에펠탑이 보이는 광장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이라 관광객들이 보이지 않아 좋았다. 


에펠탑은 오래된 친구 같다. 이번이 세번째 에펠탑을 마주하는 날이지만 살면서 무수히 마주하는 에펠탑의 이미지 때문일까 그렇게 낯설지는 않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볼때마다 느껴지는 경외감은 늘 새롭다. 굉장히 이른 아침이기 때문에 관광객은 적었지만 그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웨딩 촬영을 하는 신혼부부들이었다. 그들은 조금 이른 아침 방문해서 사람들이 없을때 원하는 사진을 많이 찍으려는 것 같았다. 신혼부부가 있는 에펠탑이야말로 진정한 풍경의 완성이다. 십년이 지났지만 에펠탑 악세서리를 들고 관광객들을 매의 눈으로 살펴보는 상인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났는데도 저들만은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 저들 또한 이미 에펠탑 풍경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 같다. 만약 에펠탑 주변에 그들이 없다면 “왜 이제는 악세서리를 파는 흑인들이 없을까?”하며 되려 그리워질지도 모를 일이다.


에펠탑은 파리 올림픽을 준비하며 각종 공사가 한창이었다. 에펠탑 주변을 가볍게 돌아 다른 길로 숙소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참새 방앗간을 많이 들르다보니 어느새 시간은 7시 반이 다되어있었다. 일부러 온 길 그대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파리의 골목을 통해 숙소로 돌아갔다. 골목골목에서 이제 분주하게 출근하는 프랑스 직장인들을 마주 할 수 있었다. 일상과 여행이 교차되는 이 순간이 묘하게 짜릿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8시 정도가 되어있었다. 평소같으면 이제야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겠지만 이미 파리 구경을 하고 오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잠시 숙소 테라스에 앉아서 차를 마셨다. 숙소에서 마냥 쉬는 것도 좋기는 하겠다만 파리를 온전히 하루종일 즐길 수 있는 날이 오늘 하루 밖에 없다. 얼른 씻고 나갈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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