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독일유학 시작

by 하스텔라

생활비를 아껴보려고 작은 원룸을 얻었는데, 그곳엔 침대조차 없었다. 오직 책상 하나와 의자 두 개, 작은 캠핑용 부엌만 있었던 원룸에서 우리는 담요를 깔고 잠을 잤다.


친구와 나는 독일어를 빨리 배우자는 목표 하나로 인터넷도 신청하지 않았는데(왜 이런 쓸데없는 객기를 부렸는지 원..), 가족과의 연결, 한국과의 연결이 두절되고 사람들과 말도 안 통하니 낙동강 오리알처럼 하루하루가 공포였다.

서로를 의지하며 울기도 많이 울었었는데..

만약 그 친구와 함께하지 않았더라면 내 유학생활은 이미 끝날을 것이라 생각한다.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며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고, 인터넷이 있는 장소들도 알게 되면서 점점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슬픔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었지만, 전화를 하지 않고 메일로만 소식을 주고받았다.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약해져서 귀국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독일에 온 지 두 달쯤 되었을까 당시 남자친구와는 헤어졌고, 내 첫 발걸음을 동행해 주었던 친구는 워킹홀리데이비자가 끝나기 며칠 전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 후 나는 유학을 떠난 지 1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부모님과 전화 통화를 했다.


그때 알게 된 사실은, 내가 떠난 후 어머니는 4개월 동안 무기력함과 허탈감으로 밤낮을 울며 시간을 보냈다는 것. 면회를 가지 못했고, 전화도 못했기에 군대 떠나보낸 것보다 더 강한 슬픔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 통화 내내 많이 울었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흑흑..)

한편 아버지는 한참 콧물 흘리며 울고불고하던 우리 모녀의 통화를 듣다가, "다 잘되려고 하는 건데! 억지로 갔니? 정신력! 열심히 해야지!" 라며 내가 독일이라는 더 넓은 세상에서 꿈을 펼친다며 기뻐하셨다.

역시 아버지들은 자식들을 강하게 키우신다. 허허


슬프긴 했지만, 이러한 경험 덕분에 나는 단단해질 수 있었고, 이를 꽉 물고 공부할 수 있었다.


혼자였다면 결코 버텨내지 못했을 그 시절, 나를 응원해 주고 도와주었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곤 한다.

때로는 내가 잘나서, 내가 선택을 잘해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라 착각하기도 한다.


이미 연락이 끊겨버린 많은 인연들이 너무 그립다.

내 추억 속의 한 페이지를 채웠던 그 많은 인연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고마움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이 다가온다.


이제는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가끔씩 마음속으로나마 감사의 인사를 전해본다.


고마웠어요 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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