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안암꼬치

그 시절, ‘햇빛촌’과 가장 가까운 동아리가 있었다.
이름은 ‘역과’.

‘역사와 과학’의 약자였지만, 사실상 학생운동의 이론적 본산이었다. 낡은 책 냄새와 담배 연기가 늘 방 안을 채웠다.

“영실이 왔구나!”

책상에 엎드려 있던 승길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92학번, 영실이 가장 존경하던 선배였다. 언제나 손에 책을 들고 있었고, 눈빛은 진지했다.

“형 뭐해요?”
“나? 책 읽지.”
“무슨 책인데요?”
“마르크스랑 레닌 이론 정리한 거. 마레주의라고 하지.”
“그거 너무 어려운 거 아니에요? 재미없어 보이는데.”

승길은 웃지도 않았다.
“영실아, 운동을 하려면 이론부터 알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남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는 꼭두각시밖에 안 돼.”

“저는 학생운동 안 할 건데요.”

영실은 손사래를 치며 옆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던 정태 형이 있었다. 87학번, 전설처럼 떠도는 이름이었다. ‘사상가’라는 별명이 붙은 사람이었다.

“형, 또 삼국지 하세요?”
정태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영실아, 담배 있냐?”
“없어요. 저 담배 안 펴요.”

정태는 재떨이에 버려진 담배꽁초 중 덜 탄 걸 집어 들었다. 불을 붙이자 희뿌연 연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럼 밥이나 사라.”
“저도 돈 없어요.”
“다들 가난하구나, 혁명가들이.”

방 안엔 낡은 전기난로가 윙윙거렸고, 책상 위엔 《자본론》, 《레닌 전집》, 《알튀세르의 구조주의》가 뒤엉켜 있었다. 승길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

“정태 형, 여기 ‘비국가주의’가 뭐예요?”
“그건 말이야, 마레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이야.”
정태는 천천히 연기를 내뿜었다.
“지배계급의 권력을 해체하겠다고 하면서, 결국 또 다른 권력을 세우는 게 국가주의야. 그건 진짜 혁명이 아니야.”

“그래도 소련은 위대한 나라잖아요. 공산혁명의 모델인데.”
“하!” 정태가 웃었다.

“그게 바로 문제야. 혁명이 끝나는 순간, 권력이 시작되지.”

승길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표정이 어려웠다. 정태는 책 몇 권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건 알튀세르, 이건 발리바르. 프랑스 철학자들이지.”
“형, 변절자들이라던데요?”
“변절이 아니라 진화야. 사상도 늙고 변해.”

영실은 두 사람의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형들, 그만 얘기하고 술이나 마시러 가요.”
정태가 피식 웃었다.
“좋지. 근데 돈 있냐?”
“없어요.”
“나도 없는데.”
셋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야, 일단 가보자. 혁명은 언제나 즉흥이지.”

그들은 책 몇 권을 던져두고 안암꼬치로 향했다. 겨울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아저씨, 소주 두 병이요.”
“안주는요?”
“조금 있다 시킬게요.”

소주가 돌기 시작하자, 대화는 다시 철학으로 흘러갔다. 마르크스, 소련, 혁명, 인간 해방.
그러나 그들의 말끝엔 웃음이 섞여 있었다. 빈 술병이 어느새 여덟 개로 늘었다.

“영실아, 오뎅국물 좀 받아와라.”
“또요? 형이 좀 가요. 벌써 세 번째잖아요.”
“후배는 심부름도 혁명이다.”

영실은 투덜거리며 주방으로 갔다가, 주인아저씨에게 한 소리 듣고 다시 국물을 들고 왔다.
‘이 형들은 도대체 무슨 혁명을 하겠다는 거야…’

술자리가 파하고 정태는 계산대로 갔다.
“아저씨, 내일 갚을게요. 외상 좀.”
“뭐라고? 외상? 이 녀석들, 안주도 안 시키고 소주 여덟 병을 외상으로?”
정태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혁명도, 외상도 내일이면 해결됩니다.”

주인아저씨는 혀를 차며 말했다.
“그래, 혁명가 양반들, 다음엔 안주도 시켜라.”

그날 밤, 세 사람은 웃으며 안암거리를 걸었다.

찬바람 속에서도 어깨를 부딪치며, 서로의 체온으로 겨울을 견뎠다.

‘이 사람들, 참 웃기지만… 따뜻하다.’
영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스무 살은 늘, 그렇게 허기졌지만 따뜻했다.

keyword
이전 09화9. 후배와의 만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