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2023년 고연전

영실은 1993년 9월, 버스 안에서 신문에 싸인 쇠파이프를 바라보며 느꼈던 긴장감이 문득 떠올랐다.
오늘 열차 안, 자전거를 든 사람들로 가득한 풍경이 어쩐지 그때와 닮아 있었다. 그때는 저항을 위한 행진이었고, 지금은 삶을 사랑하기 위한 행진이었다. 하지만 두 곳 모두 공통의 공기가 있었다.

서로를 배려하고, 두려움을 이겨내며, 함께 나아가는 사람들의 연대감. 그 온기가 열차 안에 가득했다.


양수역에 도착하자, 속초에서부터 달려온 타바 본대가 합류했다. 수십 명의 자전거가 일제히 출발하자, 바퀴가 아스팔트를 문지르는 소리가 파도처럼 이어졌다.

“수십 명이 함께 달리니까 만만치 않네. 갑자기 속도도 바뀌고, 브레이크도 자주 밟아야 하고…”
영실이 헐떡이며 말했다. 앞서가던 종훈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달리면 내 페이스대로 가기 힘들지. 앞사람 기어 맞추고, 페달 회전수 비슷하게 가져가 봐. 리듬을 타는 거야.”

영실은 그 말대로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곧 조금씩 뒤처지기 시작했다. 간격이 벌어지자 뒤에서 다른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결국 영실은 처음 위치보다 한참 뒤에서 달리게 됐다.


잠실대교에 이르자 모든 타바 회원들이 모였다. 70년대 학번부터 2010년대 후배들까지, 70여 명의 자전거가 강바람에 반짝였다.

근수가 바나나를 먹으며 말했다.
“이제 40킬로만 더 가면 돼. 행주대교에서 한 번 쉬자.”

93학번은 세 명뿐이라 후미 그룹에 섞여 출발했다. 영실은 천천히 페달을 밟다가 몸이 근질근질해졌다.

“근수야, 아까 간식 먹고 힘이 남는데?”

“그럼 우리 추월해볼까?” 종훈이 웃었다.

“좋지, 가즈아~~!” 세 사람은 외쳤다.

“레이스!” 영실이 선두로 튀어나갔다.

기어를 한 단씩 올릴 때마다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앞서 가던 팀을 하나둘 추월하며, 그의 얼굴에는 모처럼 뜨거운 생기가 돌았다. 하지만 뒤에서 종훈이 소리쳤다.

“영실아, 멈춰! 이건 레이스가 아니야. 우리 함께 가는 거잖아.”

근수가 뒤이어 말했다.
“맞아, 지금은 경쟁이 아니라 동행이야.”

세 사람은 속도를 줄이고, 다시 대열에 합류했다. 행주대교에서 휴식하던 영실은 웃으며 말했다.

“근데 아까 추월하니까 너무 재밌더라.”

“나도.” 종훈이 웃었다.

“이제 두렵지가 않아. 그룹 라이딩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근수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봐, 별거 없지? 결국 네가 해낸 거야.”

영실은 하이파이브를 하며 대답했다.
“너희랑 같이 해서 가능했어.”

이제 남은 구간은 고양 체육관까지 20킬로. 70명의 타바 회원이 일렬로 대열을 정비했다. 맨 앞의 선발대가 길을 탐색하며 신호를 보냈다.

“봉~, 홀~, 턱~, 추월~, 앞에 차~, 서행~.”

그 신호가 파도처럼 뒤로 전달됐다.
누군가가 넘어진다면, 모두가 멈췄다. 그리고 함께 다시 달렸다. 거대한 대열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모습은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는 생명체 같았다.


고양 체육관이 눈앞에 보였다. 경기장에서는 응원단의 함성이 하늘을 찢고 있었다.

“다 왔습니다! 조금만 더 힘냅시다!”
선두의 회장이 소리쳤다. 도로를 통제하던 경찰이 손짓했다.

“차도로 이동하세요!”

6차선 도로를 가득 채운 자전거들이 일제히 속도를 올렸다. 바람이 귀를 스쳤고, 영실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93학번, 앞으로 나와! 오늘의 주인공이야.”

영실과 종훈은 플래카드를 들고 맨 앞에 섰다.
“입학 30주년을 축하합니다, 타바!”

럭비 경기의 하프타임, 자전거 행렬이 고양 체육관 안으로 들어섰다. 젊은 고대생과 연대생들의 함성이 폭발했다. 영실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오랜만에 고연전에 오니까 가슴이 뛰네. 이 열기를 우리 애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럼 데려와. 네 집 가깝잖아.”

“그래, 그래야겠다.”

잠시 뒤, 영실은 딸들을 데리고 경기장으로 돌아왔다.

“아빠, 여기 오면 뭐 먹을 거 줘?”
“간식은 동기들이 준비했을 거야.”

둘째 하니는 투덜댔다.
“이렇게 더운데 꼭 가야 해? 재미없을 것 같아.”

“가서 봐봐. 네가 언젠가 갈지도 모를 대학이야.”

경기장은 함성으로 진동했다. 응원단의 율동, 북소리, 붉은 깃발의 물결. 딸들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응원가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응원단 동기들이 아이들에게 간식을 던져주며 웃었다.

“아빠, 저기 저 사람 연예인 아니야?”
“저 사람? 미스코리아 출신이야. 한성주라고.”
“미스코리아가 뭐야?”
“우리나라에서 제일 예쁜 사람 뽑는 거야. 그런데 아빤 너희 엄마가 제일 예뻐.”

“에이~ 아빠 또 그런다.”

영실은 딸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뜨거운 햇살 아래, 그의 얼굴엔 오래된 미소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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