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영실은 옥비의 부탁을 받아 ‘태영’ 본사에 동행하기로 했다.
“옥비야, 승길이 형한테 내 얘기 안 했지?”
“응. 그냥 한국 와서 오랜만에 만난 동기랑 같이 간다고만 했어.”
로비에 들어서자 고급스러운 향이 코끝을 스쳤다.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공장은 자동화 설비가 쉼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공대생의 심장’이었던 영실의 눈빛은 잠시 반짝였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회의실에 들어서자,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깊게 그을린 얼굴, 여전히 단단한 어깨. 이승길.
그는 영실을 보는 순간 멈칫했다.
“너... 영실이 아니야?”
“승길이 형, 오랜만이에요.”
순간, 회의실 공기가 따뜻해졌다. 승길은 주저 없이 다가와 영실을 꼭 껴안았다.
“야, 인마… 왜 연락을 안 했어.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데.”
“그냥... 학생운동 하다 접고, 대기업 들어가서 평범하게 산다는 게 왠지 부끄러워서요.”
“부끄럽긴 뭐가 부끄러워. 자기 자리에서 성실히 살아온 게 제일 자랑스러운 거야.”
그 따뜻한 상봉을 지켜보던 옥비가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테슬라 자동차 설계팀장 이옥비입니다. 영실이랑은 대학 동기예요.”
“아, 반갑습니다. 이번 건은 제가 검토했습니다.”
승길은 금세 사업가의 얼굴로 돌아왔다.
“테슬라와 독점 계약이라... 구체적인 조건이 어떻게 되는지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회의는 치열하면서도 진지하게 이어졌다. 옥비의 자신감 있는 제안, 승길의 현실적인 판단, 그리고 영실의 중재가 어우러져 마침내 긍정적인 합의에 도달했다.
“좋아요. 세부 조율은 미국 쪽 본사와 협의하죠.”
회의가 끝나자 승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영실아, 오늘 정말 반가웠다. 대영이 형이랑 정태 형한테도 얘기할게. 우리 셋이 술 한잔하자.”
“정말요? 대영이 형 너무 보고 싶네요.”
“대영이 형은 지금 중국 공장에 있어. 정태 형은 여전히 본사에서 전략총괄 맡고 있고. 그때 삼국지에 빠져 살던 그 형이 이제는 회장이 됐어.”
영실은 웃었다.
“정말 인생은 예측할 수가 없네요.”
빌딩을 나서는 옥비가 말했다.
“영실아, 네 덕분이야. 오늘 계약 성사에 내가 큰 도움을 받았어.”
“무슨 소리야. 나야말로 옛날 선배를 다시 만나게 해줘서 고맙지.”
“그나저나… 아직도 초콜릿 좋아하니?”
“이젠 안 먹어. 당뇨가 있어서. 근데 우리 딸들이 아주 좋아해.”
“정말? 잘 됐다.”
옥비는 차 트렁크를 열어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꺼냈다.
“이거 미국에서 제일 유명한 초콜릿이야. 딸들한테 줘.”
“고마워, 옥비야.”
한 달 후, 영실에게 승길의 전화가 걸려왔다.
“영실아, 금요일 저녁에 시간 되지? 대영이 형도 중국에서 들어왔어. 우리 그때처럼 ‘대성집’에서 보자.”
영실은 잠시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
“예, 형. 꼭 나가야죠.”
그날 저녁, 회사가 끝나자마자 영실은 오랜만에 설레는 마음으로 ‘대성집’ 간판 불빛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