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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준다는 것

by 한그리 유경미

아기가 태어났을 때, 나는 엄마라고 빨리 불리고 싶었다. 임신 동안 아기에게 지겹게도 “아가야, 엄마야. 우리 금방 만나자.”라며 아기를 쉼 없이 불렀다. 아기 셋을 키울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오물오물하던 아기들이 “엄마”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내뱉고 나를 빤히 쳐다볼 때였다. 상황을 판단하는 잠깐의 정적이 환희로 바뀌면서 “맞아, 엄마야. 엄마 불렀어?”라며 즐거워했다. 누군가의 호칭을 부르는 순간 나는 누군가의 커다란 의미로 변해 있다.

우리 집에 살게 된 ‘달이’는 이름을 붙인 순간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그저 달팽이라는 개체의 이름으로 불렀을 때는 특별함이 없었다. 시골의 상추에서 함께 집으로 오게 된 달팽이는 그저 달팽이에 불과했고, 낯선 이방인이었다. 우리 집 조그만 방 하나를 차지하는 군식구일 따름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그런 그가 안쓰러웠다. 함께 살고 있었으나 존재에 대해 명확하지 않았다. 조용한 녀석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도 조용한 사람이었기에.

어린 시절, 생활기록부에는 이런 글이 있었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학급 일을 열심히 함’


조용한 사람으로 평생을 살고 있다. 글 한 줄로 그렇게 또박또박 써 준 선생님의 의견은 나를 오랜 시간 묶어두고 있었다. 이 말은 눈에 많이 띄지 않음을 의미하며, 또한 나에 대한 존재감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교실 안의 절반은 어쩌면 내 이름을 알지 못한 채 1년을 살았을 수도 있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는 ‘뒤에 앉은 말이 없고 몸집은 큰 아이’로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나름 목소리를 키우려고 애를 써보고, 다른 삶을 살아보기 위해서 변신을 꾀어 봤지만, 그건 그때뿐이었다. 본성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내 삶에서 나를 주인공으로 만든 건 결혼이 처음이리라. 결혼 후 남편이 나라는 한 사람을 불러주는 유일한 사람이라 행복했지만, 더 행복한 일은 아이들이 나를 ‘엄마’라고 불러줄 때였다. 세상으로 아기가 나오고 입을 처음 뗄 때의 표정이 기억나는가. 아가는 수십 번 머릿속으로 ‘엄마’라는 단어를 연습한다고 하지 않던가. 말로 뱉어냄으로써 아기와 나의 관계는 끊어질 수 없는 절절한 사이가 되어버린다. ‘엄마’라는 단어로 ‘경미’라는 이름을 잃어버리더라도 그조차 행복이 될 수 있는 때였다.

처음 겪는 엄마를 통해서 나의 엄마를 배웠다. 지금도 배우고 있다. 부모라는 단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쉬운 단어는 아닌 듯하다. 어머니는 통화할 때마다 나에게 “힘들지? 갈수록 태산이다.”라고 한다. 아기가 뱃속에 있을 때는 임신한 내 몸만 잘 건사하면 되었는데, 아기가 나오고 난 후에는 내 몸과 아기의 안위를 함께 걱정해야 하고, 아이가 크면서는 어딘가로 막 돌아다닐지 찾아야 하며, 사춘기를 지나가면 몸은 편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성인이되면 또 어떠한가. 대학 등록금에 사회로 잘 나아갈 수 있을지, 결혼은 할지, 2세는 만들 것인지 걱정의 걱정이 태산을 이룬다.

걱정 산과 고민 산을 넘고 넘어간다. 달팽이처럼 느리지만 꾸준히 올라섰다 내려서기를 반복한다. 달이야, 라고 부르면서 한 가족이 된다. 그 말을 아는지 모르는지 달이는 언제나 묵비권이다. 얼마나 오래 돌보고 사랑할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지나가는 나그네와는 다르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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