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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대한 너와 나의 이야기

by 한그리 유경미

끈끈한 액체를 바닥에 묻히며 스윽 지나간다. 출렁이는 달팽이 달이의 발은 파도치는 물결 같다. 무얼 보고 가는 것이냐. 앞에 뭐 좋은 것이 있다고 앞으로 향하는 것이더냐.

달팽이의 눈은 큰 더듬이 끝에 있다. 큰 더듬이 두 개 끄트머리에 달린 눈은 흑백만 겨우 구분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대체할 수 있는 작은 더듬이는 눈 아래쪽에 한 쌍이 있다. 방향을 찾고 촉각을 느끼는 더듬이 덕분에 필요한 곳을 향해 나아갈 수 있으리라. 눈은 형상만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변 공기를 통해 느끼고 만지며 길을 가는 것과 같다.

통 안에 상추를 넣으려 했다. 자고 있는지 달이는 꿈쩍을 하지 않기에 상추로 달팽이 등을 툭툭 건드렸다. 움직임이 느껴졌는지 달이는 집에서 머리를 꺼냈다. 살구빛 새하얀 살이 밖으로 조심스레 나왔다.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동시에 더듬이들도 자유자재로 조절하며 앞을 향해 나아갔다. 나는 상추를 입으로 가져다주기 위해 상추를 얼굴 가까이로 들이밀었다.

순간 달팽이의 더듬이 꼭대기 눈이 상추와 닿았다. 눈을 깜박이는 것 같았다. 찰나의 시간 동안 눈은 더듬이 안으로 쏙 들어갔다. 내 실수였다. 깜짝 놀란 나는 달팽이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그럴 의도는 없었어.” 물론 답이 없는 달이는 묵묵히 제 할 일을 찾아 상추로 향한단다. 어쩌면 그의 콤플렉스일지도 모르는 눈을 아프게 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내 콤플렉스 역시 눈이다. 어려서부터 내 눈은 시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4학년 말 갑자기 잘 보이던 시야는 흐릿해졌다. 괜찮다고 애써 그냥 지내보려 했으나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불편한 걸 티 내지 않아도 “안경해야겠네.”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마이너스 시력이 된 이후에는 숫자가 얼마인지 자세히 들으려 하지 않았다. 만화영화 영심이의 남자친구 왕경태처럼 내 안경 역시 빙글빙글 돌았다.

컬러텔레비전이 날 현혹시켰는가. 당시엔 텔레비전으로 유행의 척도를 가늠할 수 있었다. 밤이면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아들과 딸’를 보며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에는 ‘가요톱텐’을 보면서 다음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두운 데서 책을 보느라 눈이 나빠졌다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텔레비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어려서 일을 이야기할 때 책을 참 많이 봤다고 하는데, 나는 텔레비전의 드라마를 좋아했다. 책을 볼 기회가 적어서였을까, 지금도 텔레비전의 드라마와 예능 OTT의 영화, 드라마를 열심히 본다. 사람마다 다르니까, 라며 합리화를 하며 눈 나빠진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나의 운명이라며 토닥인다.

눈이 나빠 불편한 점이 많다. 온도 차이가 많은 날에는 안경에 습기가 찬다. 비눗물로 닦거나 세정제를 사용하는 일도 한두 번이다. 비 오는 날에는 안경알에 물방울이 하나만 떨어져도 신경쓰인다. 막상 찾으면 안경 닦는 천을 안 가져와 난감하기도 하다. 우리 집에는 안경 쓰는 사람이 네 명이라 안경점에서 얻어온 천이 수북하다. 안경도 많이 맞추니 우수고객이다. 안경이 비싸지만 내 눈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지 않은가.

안경을 처음 맞추었을 때 앞이 보이지 않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지금까지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으나 우리 몸의 한쪽 기관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다면 큰일이다. 그래도 우리는 적응하며 살 것이다. 달팽이처럼 흑백만 구분할 정도가 되더라도 꾸준히 인생을 살리라.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 아닌가. 필요에 의해 바퀴를 만들고, 날개를 만들지 않았는가. 길을 만들었고, 건물을 만들어냈다. 나 또한 묵직한 안경을 쓰고 적응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나의 인생과 달팽이의 생은 닮았다. 사회로 내던져진 후 적응해 살고, 잘 보이지 않아도 아이들을 이정표 삼아 생의 끝으로 끝으로 느리게 이동한다. 그 끝이 어디가 되든 우리는 삶을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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