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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 퀸 Dec 24. 2023

크리스마스 선물

그가 기다리고 있다. 빨리 가야 하는데. 그가 덜 춥도록...


하지만 내 맘과는 달리 후들거리는 두 다리는 술 취한 모양으로 헛논다.


골목길 모퉁이를 돌자마자 나를 한눈에 알아본 그가 저 멀리서 한 걸음에 달려온다. 와서는 연신 고개를 숙인다. 죄인처럼.


"이보게, 올해도 어김없이 나왔구먼~ 잘 왔네, 잘 왔어!" 난 그의 두 손을 덥석 잡고 뿌옇게 김서린 식당 유리문으로 그를 이끈다.

"네~ 올해도 사장님 신세를 또 지게 되네유." 그의 고개가 더 아래로 떨어진다.

"뭔 소린가 이 사람아, 내 자네를 보니 이리 반가울 수가 없구먼. 배고프지? 자, 어서 들어가자고."

수년 동안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국밥집이 우리를 맞아준다. 그와 나는 크리스마스 노래를 머금은  눈꽃을 뒤로하고 주방 큰 냄비에서 스며 나오는 하얀 김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이십 년 전 이 식당에서였다. 난 그 당시 서른세 살의 총각이었고 고생 끝에 모든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던 시절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 예배에 참석한 나는 설교를 들으며 너무 치열하게 사느라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음을 자책하고 있었다. 일찌감치 서울로 올라와 혼자 생활하고 있던 나는 예배 후 굳이 휑 오피스텔에서 밥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근처에 있던 국밥집에 들어갔다. 크리스마스 기분에 들떠서 그런지 뜨끈한 국물이 목구멍을 넘길 땐 여기가 천국인가 싶었다.

성실한 국밥집 아주머니가 진득하니 끓인 진국에 감탄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쭈뼛거리며 식당 안으로 들어오는 그를 보았다. 얇고 낡은 가을외투를 여미며 고개도 똑바로 들지 못하는 삐쩍 마른 청년. 노숙자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막노동을 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세월과 함께 얼룩덜룩해진 누런 벽 위에 어색하게 얹어진 하얀 플라스틱 메뉴판을 그는 불안한 듯 살펴보았다. 그리곤 무릎이 툭 튀어나온 빛바랜 갈색 바지 주머니를 비워냈다. 잠시 손 안의 구겨진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서서히 고개를 떨구었다.


"어서 오세요. 한 분이세요?" 반갑게 맞이하는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그는 몸을 움츠리며 못 알아들을 소리를 웅얼거렸다. 그리곤 등을 돌렸다. 그때 난, 막 식당 문을 나가려는 그의 뒷모습에서 오 년 전 실업자 신세였던 내 모습을 보았다. 그를 배고픈 채로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과거의 나이기도 했기에. 그에게 밥 한 끼 꼭 먹이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그를 불러 세웠다.

우리는 같이 뜨거운 국밥을 나누었다. 허겁지겁 먹으면서도 계속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는 그는 뚝배기를 두 손으로 정성스레 들고 마지막 국물까지 다 들이켰다. 그리고 정말 이 은혜 잊지 않겠다고 붉은 눈을 꿈뻑이며 콧물을 들이켰다. 이렇게까지 고마워할 일인가 싶을 정도로 감동하는 그를 보니 내 마음이 어찌나 찡하던지 나도 모르게 그만 난 덜컥 약속을 해버리고 말았다. 매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이곳에서 만나자고. 매년 내가 국밥을 사 주겠다고...    

  



잠시 옛 생각에 잠겨 20년 전을 그리고 있던 나를 그의 목소리가 현실로 데려온다.

"그런데 사장님은요?" 숟가락을 든 그의 손이 잠시 멈추고 내 국밥이 놓여야 할 빈자리와 나를 번갈아 보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다.

"응, 아까 거래처와 약속이 있어서 계속 뭘 먹었더니 더 이상 먹을 수가 없구먼. 자네~ 많이 먹게. 배 많이 고팠었? 어서 먹게."


그런데 왜 이 사람 형편은 나아지지 않는 까? 매해 이 남자는 무릎 튀어나온 너덜너덜한 바지와 함께다. 오늘도 변함이 없군. 에구~ 밥 한 끼 사주면서 내가 뭐라고 형편을 묻고 훈수를 두겠는가. 항상 그래왔듯이 그냥 맘 편히 밥 한 그릇 먹고 가게 돈이나 내면 되지.


, 맞다! 돈~ 

주머니에 손을 넣어 물성을 확인한 나는 작은 숨을 몰아쉬며  그가 눈치 못 채게 메뉴판을 힐끗 본다.

한 때는 눈처럼 새하얬던 메뉴판이 이젠 세월을 못 비껴가고 누런 벽과 같은 색이 된 것 같아 한숨이 나온다.


"배부르게 잘 먹었습니다." 빨갛게 상기된 그의 두 볼 위로 금방이라도 투명구슬이 흘러내릴 것 같다.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괴로운 듯한 표정이 아주 잠깐 스친다. 올해도 국밥을 얻어먹어야 하는 신세가 서럽고 괴로운 것일까?

"그래, 자네가 잘 먹었다니 내가 더 기쁘구먼. 그럼 내년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이 식당 앞에서 만나세."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그럼 내년 이맘때 또 뵙겠습니더.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더." 거듭 허리를 깊이 숙이며 그는 나의 시야에서 사라져 간다.


난 행복한 사람이다. 그에겐 단 한 끼 따뜻한 국밥이지만 나에겐 일 년의 설렘이다. 그가 고맙다며 거듭 감사를 표하고 며칠 굶주린 사람처럼 국밥을 들이켤 때마다 난 내 삶이 보상받는 것 같아서 한없이 기쁘다. 누군가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뿌듯할 수가.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이 예수님 같고 내 사명이란 생각마저 든다.


아, 그런데... 왜 이리... 어지럽지? 여기서 이러면... 안... 되는... 데...




"이보세요! 아저씨! 정신 차리세요!"

"이게 웬일이래. 어머! 이 사람 얼굴 좀 봐, 몸도 다 굳은 것이 초상치르게 생겼네. 여기요. 누구든 빨리 엠뷸런스 좀 불러주세요!!"






<일 년 후>


올해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는 왔다.

오늘은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사실, 솔직히 다 말할까 해마다 고민했던 일이다. 하지만, 은인을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았다.

물론 성공했다고 알려드리면 누구보다 기뻐하실 테지만, 그렇게 되면 그분에겐 더 이상 국밥을 사주실 이유가 없어지는 거다.

이십여 년 전 그날 사장님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크리스마스 사랑을 실천하게 해 줘서 고맙다고, 뭔가 남을 위해 할 수 있는 기쁨이 너무나 크다고 좋아하시던 그 표정을 해마다 똑같이 만들어 드리고 싶었다. 이것이 내가 그 사장님께 은혜를 같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사장님은 딱히 내 사정을 한 번도 물으신 적이 없었기에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해마다 한 번도 잊지 않고 그 자리에 나오셔서 뜨끈한 국밥을 사 주시고 먹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을 뿐.

하지만 이미 똑같은 허름한 옷을 입고 갔다는 자체가 거짓이 아니고 무엇이었단 말인가?


이젠 더 이상 속이고 싶지 않다.

선의의 거짓말? 거짓말은 거짓말이다. 이렇게 그분을 속이고 나 자신을 속이는 게 과연 사장님을 위한 길일까? 혹시 내가 내 멋대로 추측해서 사장님에게 계속 기쁨을 주고 있다는 너무나 낭만적인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이제 와서 여태 거짓말을 했다고 이야기하면 과연 사장님이 이해해 주실까? 혹시 화를 내시거나 나에게 실망하시지는 않을까?

아~ 그래도 이젠 더 이상 양심을 속이고 싶진 않다.

한 해 한 해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미루고 미루다 여기까지 왔다. 계속 가난한 척하며 사장님을 위한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내가 그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럼 전부 말하지 말고 여태까지 어려웠다가 이제야 사정이 나아졌다고 이야기할까? 자연스럽게? 그러다가 사장님이 자세히 물으면? 대답하다 보면 들통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지?


그래. 일단 이야기는 해보자. 혹시 사장님이 자세히 물으시면 그땐 자세히 대답하자. 그런데 그동안 사장님이 하신 것으로 봐선 그냥 언제부터였는지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묻지 않고 그냥 축하한다는 말씀만 하실 것 같다. 그래. 부딪혀 보는 거야. 사장님이 어떻게 반응하시든 간에. 두려워하지 말고 이 거짓의 괴로움으로부터 이제 벗어나는 거야.


......


언제나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사장님을 뵐 수 있을 거란 기대감과 오늘은 드디어 사실을 고백해야 한다는 두려움에 코너를 도는 나의 두 다리는 나도 모르게 후들거리고 있었다.


어? 그런데, 그곳엔 사장님 대신 한 여인이 그리 두꺼워 보이지 않은 옷을 최대한 여미며 두 손을 호호 불고 있었다. 그녀 쪽으로 다가가자 그녀가 온화한 미소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 혹시... 아~ 남편이 말한 모습 그대로네요. 반가워요. 크리스마스이브 때마다 제 남편과 만나셨던 분이지요? 오늘은 남편대신 제가 나왔어요. 추우신데 어서 국밥집으로 들어가시죠."

"네? 저~ 사장님은..."

"아휴, 눈이 아주 펑펑 오네요. 추운데 일단 들어가시죠. 차근차근 설명드릴게요."


얼떨결에 국밥을 앞에 받아 놓고 사장님에 대해서 자꾸 물어보는 것이 실례가 될까 봐 물끄러미 그녀의 눈을 들여다봤다.


"어서 드세요. 배고프실 텐데 뜨끈할 때 드셔요."

"아, 네~."


조용히 웃고 있는 그녀 눈가에 걸린 인자함을 보니 이게 어찌 된 상황인지 궁금증은 점점 더 커져갔지만 일단 국밥은 비웠다. 그게 사모님에 대한 예의일 것 같아서.


반드시 고백하리라 큰 결심을 하고 왔는데 사장님이 오늘 못 오신다니, 사모님에게라도 말씀드려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잘 먹었습니다. 사모님, 그런데 사장님은 어디 멀리 가셨나 보네요?"

"저, 그게..."

"사실, 제가 오늘 사장님께 꼭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아, 그래요? 저런... 사실 남편은 이제 더 이상 만나실 수 없어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남편이 삼 년 전인가부터 몸에 이상이 왔어요. 그런데 저희 남편회사가 부도난 이후로는... 경제적인 상황이 안 돼서 수술받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고 약으로만 버티고 있다가..."

"네? 사장님이요? 그런 말씀 없으셨는데... 아프다는 말씀도, 사업이야기도... 전혀 말씀이 없으셨는데..."

"네~ 그 양반 성격에. 그랬을 거예요."

"전 그런 줄도 모르고..."  

"그래도 그럭저럭 약으로 잘 버티다가 작년 크리스마스 때 쓰러져서는 몸상태가 급격히 나빠졌어요. 수술을 더 미룰 수 없다고 했지만 그 큰돈을 구할 수가 없었답니다. 한 달 정도 겨우 겨우 버티다가 결국... 그이가 죽기 전 선생님 이야기를 하면서 저에게 꼭 크리스마스이브에 대신 나가달라고 했어요. 선생님이 기다리실 거라고."

"네? 그런데, 왜... 항상... 전 몰랐어요. 전혀 몰랐어요. 전 그런 줄도 모르고..."

"에구~ 울기는? 울지 마셔요. 그 양반이 해마다 크리스마스이브를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꼭 국밥을 먹여야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마다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달력에 크게 표시해 놓고 매일 바라봤답니다."

"흑흑... 저는... 몰랐습니다... 그런 줄 전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전 그런 줄도 모르고...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선생님 덕분에 남편이 크리스마스에 얼마나 행복했는데요. 예수님을 만나고 온 것 같다면서... 제가 고맙죠. 사업이 망했을 때도 몸이 아플 때도 본인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하다고 자주 말하곤 했답니다."

"아...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럴 수가... 전... 정말 몰랐습니다... 제가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아니 제가 제 생각만 하지 않았더라면... 아! 이 일을 어쩐단 말입니까? 엉엉~"

"아닙니다. 어쩌면 선생님 덕분에 좌절하지 않고 포기하지도 않고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남편이 참 잘 버텨주었거든요.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선생님은 남편이 받은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답니다."

"사모님, 죄송합니다.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제가 죽일 죄인입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절 용서해 주십시오. 흑흑!"

"아니에요,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세요. 선생님 덕분에 남편은 본인이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만족했답니다. 제가 감사하지요."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사모님에게 난 차마 진실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진실을 안다면 사모님이 어떻게 느끼실지. 여태껏 속여왔던 나를 어떤 눈으로 보실지. 내가 진작에 솔직히 말했더라면 사장님을 도와드릴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지금 사실대로 말하면 사모님은 분명 슬퍼하시다가 분노하시겠지.


진실을 토해내고 싶어 내 가슴은 미친 듯이 뛰어댔지만 내 입은 도저히 떨어지지 않았다. 어떤 것이 더 잔인한 일인지 도저히 판가름할 수 없었다. 내 맘의 짐을 벗고자 이제 와서 고백해야 한단 말인가? 너무 늦었는데? 이젠 말해봤자 소용도 없는데? 제 때에 수술비를 댔다면 사장님을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난 이제 평생 홀로 이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겠구나. 살릴 수 있는 사람을 방치한 나는 살인자다.  


살인자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모님 말에 내 심장과 내장은 비틀리고 쿵쿵거리며 비명을 질러댔다.    

난 끝끝내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아, 불쌍한 인간이여. 비겁한 위선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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