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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사초 Jul 04. 2023

# FIRE에 대한 생각

연 지출의 25배 혹은 20억 원은 정당한가?

파이어족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족) 


30대 말이나 늦어도 40대 초반까지는 조기 은퇴하겠다는 목표로, 회사 생활을 하는 20대부터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이며 은퇴 자금을 마련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이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젊은 고학력·고소득 계층을 중심으로 확산됐는데, 이들은 ‘조기 퇴사’를 목표로 수입의 70〜80%를 넘는 액수를 저축하는 등 극단적 절약을 실천한다.  

                                                       - 시사상식사전 -



본업에서 은퇴하고 시간적 경제적으로 자유롭게 살고 있으니, 주변에서 종종 아내와 나를 FIRE족이라 부른다. 우리 모습이 FIRE(경제적 독립, 조기 은퇴)라는 말과 일치하긴 하지만, 솔직히 나는 FIRE족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시간적 경제적 자유인의 꿈을 꾸기 시작한 건 2005년부터다. 그때 FIRE란 단어가 존재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당시 재테크와 관련해 짠돌이 카페나 텐인텐이라며 10년에 10억 모으기 정도가 유행했었다. 게다가 사전에 소개된 것처럼 나는 20대에 회사 생활을 시작하지도 못했고, 젊은 고학력 고소득 계층도 아니다. 여러 번의 낙방 끝에 서른이 되어서야 겨우 공무원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대졸이 흔해진 요즘, 대졸을 고학력으로 봐야 할지 의문이지만, 공무원의 뻔한 월급을 고소득이라 말한다면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다. 최근 신규 공무원의 임금이 세후 최저임금 수준도 되지 않는다거나, 박봉의 임금에 무한 책임으로 일해야 하는 공무원에 회의를 느껴 이직하는 MZ세대가 늘었다는 기사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공무원 시험 경쟁률이 낮아졌다거나 공무원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말도 자주 들린다.

소비를 줄이기는 했지만, '극단적'으로 줄였다는 말도 맞지 않다. 아내와 나는 수입의 상당 부분을 저축하며 살았지만, '극단적'으로 절약하지는 않았다.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은 가격을 고민하지 않고 구입했으며,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무리 값이 싸더라도 구입하지 않았다. 그리고 1년에 한 번 이상 휴식과 재충전을 위해 해외여행을 떠났는데, 여행과 같이 경험을 사는 일에도 돈을 아끼지 않았다.

우연히 결괏값이 같아졌을 뿐, 그 시작과 과정은 결코 같지가 않다. 이런 이유로 FIRE족이란 말은 내게 맞지 않는 옷이라 생각한다.  




가끔 책이나 유튜브를 통해 FIRE에 도달한 사람의 글이나 인터뷰 내용을 본다. FIRE에 도달한 자기만의 방법을 소개하는데, 그 대부분의 이야기가 돈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파이어의 기준을 금액으로 규정한 책도 있는데, 순자산 20억 원이나 연 지출의 25배가 바로 그 기준이다.

순자산 20억 원으로 매년 6%의 수익을 거둘 수 있다면, 인플레이션을 상쇄하고도 월 500만 원 정도의 현금흐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친절하게도(?) 매년 6%의 수익을 안정적으로 거둘 수 있는 포트폴리오까지 알려주기도 한다. 연 지출의 25배 역시 비슷한 내용이다. 연 지출의 25배만큼 순자산을 만들어 놓으면, 매년 총자산의 4% 정도만을 지출하며 경제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연간 지출이 2천만 원인 사람은 연 지출의 25배인 순자산 5억 원을 모으면 경제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 5억 원으로 매년 4% 정도의 수익을 거둘 수 있다면 자산의 손실 없이 매년 2천만 원의 현금흐름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필요한 금액이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순자산 20억 원이란 기준은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월 500만 원이 지속적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이 부럽기도 하지만, 모아야 할 금액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에 비례해 한정된 내 생의 시간을 직장이나 일에 더 많이 써야 한다는 뜻이다. 대한민국 30대의 평균 연봉이 대략 5천만 원 정도인데, 20억 원은 그 30대 직장인이 한 해도 쉬지 않고 40년을 꼬박 모아야 가능한 금액이다. 그것도 세금 제하지 않고, 먹지도 않고, 오직 숨만 쉬어야 가능하다.

순자산 20억 원에 비해 연 지출 25배는 다소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다. 사람마다 지출 규모가 다르기 마련인데, 누구나 순자산 20억 원을 모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지출 규모에 맞게 필요한 만큼의 순자산을 만들면 된다. 15년간 가계부를 써 보니, 아내와 나의 연평균 지출은 대략 2천5백~3천만 원이다. 자산으로 매년 4%의 수익을 낼 수 있다면, 최대 7억 5천만 원의 순자산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연봉이 5천만 원인 직장인이라면 40년이 아닌, 15년만 노력하면 달성할 수 있는 수준의 금액이 된다. 물론 숨만 쉬어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여기엔 보이지 않는 문제가 하나 있다. 내가 거주하는 주택(부채가 없다고 가정하자)을 순자산에 포함시켜야 할까? 부채 없는 자산이니 당연히 포함되어야겠지만, 묶여있는 자산이라 굴릴 수가 없다. (집값이 오를 수 있겠지만, 거주용이라 팔 수 없으니 더 논하지 말자.)  그렇다면 부동산 자산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으로만 연간 4%의 수익을 내면서 생활이 가능할까? 예를 들어 연간 지출이 2천만 원인 사람이 부채 없이 3억짜리 자가를 보유하고 있다면 나머지 순자산은 2억이다. 2억을 투자해 4% 수익을 낸다면 800만 원인데, 그 돈으로 1년을 생활할 수 있을까? 어려울 것 같다. 아니, 어렵다. 극단적으로 자산 확보를 위해 자가 없이 원룸 정도에서 최소한의 보증금과 극단적인 지출로, 연 지출 2천만 원에 원룸 연세까지 포함할 수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월세를 5십만 원만 잡아도 연 6백만 원인데, 남은 1천4백만 원으로 1년을 생활한다는 것은 결코 쉬워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월세와 달리 자가가 주는 주거의 심리적 안정감도 무시할 수 없는 사항이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연 지출 25배는 자가를 포함하지 않는 금액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 말은 부동산 + 연 지출 25배가 있어야 FIRE가 가능하다는 말이며, FIRE에 도달하는 시점은 뒤로 더 미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여기까지의 내용을 종합하면 FIRE는 비용이 적게 드는 부동산을 가지려 할수록, 그리고 연 지출의 규모가 작을수록 빨리 도달할 수 있다. 반대로 구입 비용이 크거나 대출이 많은 부동산을 가지려 할수록, 그리고 연 지출이 많을수록 FIRE는 점점 더 멀어진다.   



문득 한 가지 의문과 대안이 떠오른다. 연 지출 25배를 모을 경우, 자산의 손실 없이 생활이 지속가능하다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왜 꼭 자산의 손실이 없어야 할까? 내가 죽고 난 후에도 연 2천만 원이 지속적으로 나와야 하는가? 남은 가족이 있을 테니 꼭 나와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런 가정은 남은 가족이 없다면? 또는 남은 가족이 생활력이 있다면? 이란 가정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대안으로 대출이 없는 자가의 경우 주택연금을 가입하면 어떨까? (주택연금 상품도 고객이 아닌 은행의 이익을 위한 상품이라 삐딱하게 바라보지만, 그 이야기는 다음에 다루겠다) 연 지출의 25배까지 돈을 모을 필요가 없어지고, FIRE의 시계는 더 빨라질 수 있다.  




FIRE와 관련한 논의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은 FIRE의 기준을 금액으로만 판단하고, 그 돈을 모으는 방법에만 집중한다는 것이다. 중산층에 대한 기준이 국가별로 다른데, 유독 한국만이 중산층의 기준을 월 소득과 순자산, 그리고 부동산 금액 등 모두 숫자로 판단하고 있다. 이에 비해 다른 국가의 중산층 기준은 숫자가 아닌 가치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자신의 주장에 떳떳할 것, 사회적 약자를 도울 것, 부정과 불법에 저항할 것 등이다. 이외에도 외국어 구사나 스포츠 활동 또는 악기 연주 등이 포함되기도 한다.  

더 많은 논의가 이어지겠지만, FIRE 역시 금액 이상의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은퇴 후 개인의 자아실현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가, 타인을 위한 봉사활동 등 지속적인 사회 활동을 하는가, 경제적 자유를 바탕으로 특정 개인이나 단체에 일정 금액의 기부를 하고 있는가 등이 기준으로 포함되면 어떨까?

그리고 시간적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고 보니 단순히 FIRE(조기은퇴와 경제적 자유)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FIRE가 종착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류장이다. FIRE의 실현만큼이나 FIRE 이후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함께 필요하다.  




#파이어 #FIRE #경제적자유 #조기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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