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도 아니고 '먼저'도 아니었던
자몽주스를 마셨다.
오랜만에 마시니 정말 맛있는데?
잠깐만. 나 자몽주스 좋아했었지? 좋아하는 게 또 뭐였더라?
어릴 때부터 거울을 자주 보는 편은 아니었다.
거울 앞에 서 있는 시간은 짧았고 책상 앞에 앉아있는 시간은 길었다.
책상에 앉아서 거울을 가끔 보지 않았냐고? 참고서 대신 거울을 본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거울을 자주 본다고 해서 외모에 집착하는 아이라고 콕 찍을 수는 없지만, 엄마는 거울 볼 시간이 있으면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라고 했다. 스무 살까지 난 학업에 대한 중압감이 매우 심했다. 엄마의 기대가 컸다.
스무 살이 되고 나서야 책상을 떠날 수 있었다. 엄마의 꿈을 이뤄드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화장을 시작한 후에도 거울을 자주 보지 않았다.
자주 보지 않으니 거울 속의 나는 늘 낯설었다. 거울 속의 내가 나에게 말을 걸까 봐 황급히 도망가기도 했다.
결혼을 하고 가족이 생기면서 거울 앞에 오래 있는 것은 더더욱 허락되지 않았다.
나를 마주하는 시간이 줄어들수록 나를 돌보는 것은 점점 더 하찮은 것으로 여겼다.
그러던 내가 요즘 거울 앞에 자주 서 있다.
15년을 함께한 반려견이 떠나고 차례대로 아이들이 독립하면서 내가 온전히 나에게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거울 속의 나를 들여다본다.
세월은 흔적은 두드러지고 생기가 줄어들고 때로는 아파 보이기도 한다. 눈을 치켜 떠보기도 하고 탄력이 떨어진 목을 당겨보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나는 나를 잘 알지 못했다. 좋아하는 것도 그때그때 달랐고 하고 싶은 것도 그때그때 달랐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딸로서 정의된 나로 살았고 세상이 바라는 대로, 내게 기대하는 대로 살았다.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중심'이 아니고 '먼저'가 아니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나의 마음도 투영된다.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수많은 감정들이 쏟아져 나온다. 나의 감정들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를 위로한다.
그러다, 생각보다 나는 더 멋진 사람이라고 거울 앞에서 으스댈지도 모른다.
뭐 어떠랴. 스스로를 위로하고 칭찬하고 응원하는 것, 그런 걸 하고 싶었던 것 아닌가.
나를 돌보기에 서툴렀던 나. 이제는 능숙하고 노련하게 나를 돌보려 한다. 스스로 척척 '셀프케어(self-care)'로 말이다.
그렇게 하나씩 해 나간다면 나의 '자존감 (self-esteem)'도 한껏 높아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난 자몽주스를 좋아한다. 그리고 하나 더. 참치김밥도 좋아한다.
(illustration by drawsyminim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