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말이야, 평소에 잡담을 ‘의무적’으로 하는 버릇을 들여봐.”
신입 시절, 나는 말 그대로 ‘일하는 군인’ 같았다.
“네,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뭐 도와드릴 일 없을까요?”
그 외에는 말을 거의 안 했다. 부장, 차장들은 너무 높아 보여 조심스러웠고, 직장이란 곳은 원래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바로 윗사수였던 배 대리가 넌지시 말했다.
“부장이나 차장이나 나나 다 똑같아. 회사 밖에선 그냥 아저씨고 형이고 오빠야.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마. 가끔 그냥 살아가는 얘기도 하는 거지. 어떻게 일만 하고 사냐.”
어느 책에서도 직장 상사에게 ‘잡담’하는 법을 알려준 적이 없다. 그건 어떻게 하는 건가요,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너무 바보 같은 질문 같아 고개만 끄덕였다.
배 대리는 내 표정을 읽은 듯 말을 이었다.
“잡담이 어렵게 느껴지면, 그냥 너 얘기 먼저 해봐. 예를 들면 핸드폰 바꿨다든지, 어제 영화 본 얘기라든지. 휴가 계획 같은 것도 좋고. 그냥 아무 쓸모없는 얘기로 시작하는 거야.”
그다음 날, 고 부장과 김 차장 포함해 다 같이 점심을 먹고 나서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자는 얘기가 나왔다. 평소처럼 “아 저도 좋습니다!”라고 말하려던 찰나, 나는 이번에야말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잡담'을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마침, 어제 먹었던 수박바가 생각났다. 수박바, 참 맛있었는데.
“아이스크림 중에 수박바 있잖아요. 혹시 수박바 빨간색 부분 좋아하세요, 초록색 부분 좋아하세요? 저는 초록 부분이 더 맛있어서, 옛날에는 일부러 빨간색은 동생 주고 초록색만 먹기도 했거든요.”
순간, 정적.
아, 제길. 역시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았다. 그냥 평소대로 가만히 있을걸.
그때 배 대리가 눈치를 챘는지, 어색해질 뻔한 분위기를 툭 건드리며 자연스럽게 말을 받아주었다
“아 진짜? 너도 그랬어? 나도 초록색 부분만 먹고 나머지는 버려서 엄마한테 두들겨 맞을 뻔했는데. 나랑 똑같네~”
“아, 역시 배 대리, 그때부터 남달랐어. 엄마한테 맞을 만했네. 요즘 우리 애들도 음식 남기면 내가 얼마나 혼내는데, 이 과장은 안 그러잖아?”
“저는 수박바 말고 더블 비얀코 아세요? 위에는 소프트 아이스크림 있고 밑에는 셔벗 조금 있는 거요. 전 셔벗을 더 좋아했거든요. 사람들 생각하는 게 의외로 비슷하네요, 하하.”
몇 년 전, ‘거꾸로 수박바’라는 아이스바를 처음 봤을 때, 그날의 에피소드가 문득 떠올랐다.
그때 처음 알게 됐다.
직장에서의 위치나 지위를 너무 어렵게도, 너무 과하게도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걸. 다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거고, 그 안에서 생각하는 것, 고민하는 것들은 의외로 참 비슷하다.
그걸 알게 된 건, 아주 사소한 잡담 하나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