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마지막 학기.
학점도, 자격증도, 어학 점수도 어설펐다. 그래도 될 수 있는 한, 많이 넣었다. 수십 군데 이력서를. 그런데 돌아오는 건 정중한 거절 메일뿐이었다. ‘귀하의 소중한 시간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유감’이라는 문장이 어느 순간부터는 당연한 인사말처럼 느껴졌다.
그날도 비슷한 아침이었다.
새벽까지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해장도 없이 축 늘어진 몸으로 집에 돌아가던 길. 건널목 반대편에서 한 남자가 정장 차림으로, 서류 가방을 손에 들고 뛰어가고 있었다. 셔츠는 약간 구겨져 있었고, 구두는 먼지투성이였지만, 그 모습이... 이상하게 멋있었다.
‘아, 나도 저렇게 어디론가 급하게 뛰어갈 수 있었으면.’
‘시간에 쫓길 일이 생겼으면.’
그때 느꼈던 감정은 ‘부럽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건 일종의 결핍이었다. 나라는 존재가 지금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 같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놀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그 외로움.
첫 직장에 붙었을 땐, 기분이 좀 달랐다.
면접 통보를 받고는 누가 볼세라 혼자 웃음이 터졌고,
출근 첫날 아침엔, 회사에서 받은 사원증을 괜히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다. 그 플라스틱 카드 하나가 나를 사회에 들여보내주는 입장권 같았다.
회사에서 나눠준 노트북 가방을 들고, 당당하게 버스에 올랐다. 왠지 모르게 어깨가 펴졌고, 무거운 것도 아닌데 가방을 더 단단히 쥐었다. 그때 김 책임이 툭 던지듯 말했다.
“회사에서 준 개 목걸이를 뭐 하러 자랑스럽게 걸고 다녀.”
모두 웃었지만, 나는 그 말이 그리 얄밉지 않았다.
진심으로 그 사원증이 좋았으니까. 그게 나를 증명해주는 무언가처럼 느껴졌으니까.
하나하나 배우는 게 재밌었고, 상사가 “이거 할 수 있겠어?” 물으면 속으론 쫄리면서도 겉으론 “해보겠습니다”라며 기꺼이 일을 달라고 했다.
밤늦게까지 남아있어도, 가끔은 야근이 특권처럼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내가 지금 이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착각이, 그때는 고마웠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그 사원증이 목을 조이는 것처럼 느껴졌던 순간은.
출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몸이 천근만근이고, 주말만을 바라보며 견디는 월요일이 반복되고, 사원증은 이제 가방 깊숙이 처박아둔 채, 출입문 앞에서만 꺼낸다.
예전에는 회사에 나를 입증할 뭔가를 맡겨달라고 애썼는데, 지금은 그저 나를 놔주는 시간을 기다린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이 출근길이, 완전히 싫지는 않다.
매일 아침 알람 소리에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수도 제대로 못 한 채 집을 나서지만, 해야 할 일이 있고,
기다리는 동료가 있고,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책임져야 할 자리가 있다는 건 매일 나를 어딘가에 묶어두는 사회적 중력이 된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깊은 주머니 속에 처박힌 명함 한 장. 그걸 꺼내어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자체로 조금은 든든하다고. 누군가에게는 아주 대단한 타이틀도 아니고,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딘가에 소속되어 일하고 있다는 생각은 지금 내가 사회 속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작은 증거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일하는 날들이 고단할수록, 주말은 더 소중해지고 휴가는 진짜 '쉼'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쉼이 달콤한 건 직장이라는 다시 발 디딜 수 있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지하철 거울에 비친 나를 본다.
구겨진 셔츠, 부은 눈, 조금 헝클어진 머리.
그런데도 문득, 그날 반대편에서 뛰어가던 그 남자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그래, 나도 결국 저렇게 됐구나.’
... 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