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설팅 업계에 발을 들이고 가장 먼저 배운 건, ‘야근은 선택이 아니라 기본값’이라는 사실이었다. 프로젝트 막바지에는 주말 근무가 당연했고, 새벽에 불이 켜진 사무실도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저녁 6시에 일어나 가방을 드는 게 더 눈치 보이는 세계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당연한 풍경 속에서 정반대의 리듬으로 사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내 옆자리에서 일하던 정 이사였다. 그는 언제나 같은 시간, 노트북을 덮고 자리를 정리하더니 퇴근 시간이 되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 나는 6개월 프로젝트 동안 단 한 번도 그의 야근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대체 일이 없는 건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의 업무 성과는 흠잡을 데가 없었고, 오히려 고객 평가도 좋았다. 같은 팀원들이 쩔쩔매며 늦게까지 남아 있을 때도, 그는 태연하게 퇴근길에 올랐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이사님, 그런데 정말 한 번도 야근을 안 하시잖아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세요?”
그는 잔을 내려놓으며 오히려 나에게 되물었다.
“너는 직장 생활하면서 목표가 뭐니?”
“목표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내가 보기에 직장인의 목표는 단 하나야. 바로 정시 퇴근이지.”
순간 어리둥절했다. 목표라 하면 성과, 승진, 연봉... 이런 걸 떠올리는데, 정시 퇴근이라니. 하지만 정 이사는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왜 정시 퇴근이 목표가 되어야 할까? 이유는 간단해. 회사가 정규 근무시간을 정해놓은 건, 그 시간 안에 일을 끝낼 수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야. 그런데 야근을 한다는 건, 그 가정이 어긋났다는 뜻이지. 그렇다면 이유는 딱 세 가지밖에 없어.”
그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설명했다.
“첫째, 네 일이나 네 상사의 업무 관리 실패. 주어진 일을 예측하고, 우선순위를 정해 처리하는 게 기본이잖아. 그런데 야근이 필요하다면 계획이 잘못됐거나, 관리가 제대로 안 된 거지.
둘째, 습관처럼 굳어진 늦은 퇴근 문화. 신입 때부터 눈치 보며 늦게 나가던 게 습관이 돼 버린 경우지. 별다른 이유도 없으면서, ‘남아 있어야 안심되는’ 이상한 관성. 사실 내가 제일 안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셋째, 정말 물리적으로 일이 많은 경우. 하지만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회사 전체의 리소스 배분 실패야. 필요한 만큼 인력을 충원하지 않거나, 비정상적으로 일을 몰아준 결과니까. 넓게 보면 역시 매니지먼트 실패지.”
그는 잠시 멈추고 내 눈을 바라보며 결론을 지었다.
“그러니까 정시 퇴근은 단순한 ‘칼퇴’가 아니야. 회사와 개인이 업무를 제대로 관리하고, 계획대로 실행했다는 증거야. 즉, 정시 퇴근은 조직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하나의 지표가 되는 거지. 그래서 직장인의 목표가 정시 퇴근이어야 한다는 거야.”
듣고 보니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야근을 ‘열정의 상징’으로 여겼는데, 그의 말대로라면 오히려 야근은 관리 실패의 결과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요... 현실에서는, 딱히 급한 일 없어도 고객이나 상사가 늦게까지 남아 있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정시 퇴근하면 좀 눈치 보이지 않나요?”
정 이사는 술잔을 내려놓고, 특유의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경우에도 다 방법이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