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의 시
박성현
태어난 후
내가 움켜쥔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아무 일 없던 일생이
아무 일 없는 채 저 길 너머로
사라졌다
한밤에 집을 나서고
도시와 마을과 호수를 지나
아직 꽃 피지 않은
상수리나무 언덕에 앉아서
나는,
철로가 놓인 평원을 주의 깊게 지켜봤다
일정한 속도로 분할되는 공간의
미세한 잔상들,
대낮에도 웅크려 있는
투명한 회색을 건져내면서
나는,
내 이름들과 이야기를 모조리 지웠다
포스트잇처럼 쉽게 떨어지고
삭제되는 옛날
그러나 궤도는 이미 무한으로 향했으니
상수리나무 언덕에 앉아
들판을 바라보는 소년이 있다면
그대로 두어야 하리 태어나면서 움켜쥔
그의 모든 것들이 사라질 때까지
* 웹진 <같이 가는 기분> 2023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