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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옹에서 하룻밤

by 박성현 Aug 02.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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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옹에서 하룻밤


    박성현




    여자는 딱딱해진 빵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 접시에 담는다  

    

    버터가 묻은 나이프 옆에는 잘 익은 오렌지가 기울어져 있다 굴러가다 잠시 멈추었다     

 

    팔꿈치가 닳아버린 스웨터를 만지작거리며 여자는 녹나무 이파리 속으로 스며든다   

   

    그때, 윗입술에 설탕이 묻어 있다고 남자가 말한다 눈꺼풀이 천천히 닫히고     


    여자는 어두컴컴한 기록물 보관소에서 식어버린 혓바닥을 꺼낸다  

    

    하룻밤 만에 시꺼멓게 타버린 북쪽 해변 모래 숲에는, 아직도 눈사람들이 녹고 있을까      


    죽은 손끝을 들자, 남자의 손이 느릿느릿 따라 올라왔다







    시집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 문예중앙, 2018. 수록



                          





[以後, 시작노트] 시는, 사물의 꿈이다. '언어'를 다루는 인간으로서는 불행하지만 사실이다. 시인은 단지 그 꿈의 입구를 서성거리는 존재이며, 가끔 문이 열릴 때 꿈의 단편을 읽을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시는 '사물의 꿈'이라는 완벽하게 고립된 침묵의 주변을 맴도는, 또 하나의 불완전한 침묵이다. 불완전할 수밖에 없으므로 시는, 자신이 내뱉은 언어의 축축한 내륙을 끝없이 미끄러지며 문장의 속삭임과 그 조용한 허밍을 찾아헤맨다. 시의 장소와 시간, 그리고 의미 들은 단지 하룻밤 묵는 간이 숙소일 뿐이다. 시는 고착을 거부한다. 움직이고 스며들며 표정을 바꾼다. 사물의 꿈에서는 성별조차 무력해진다. 시는 서성거린다. 하지만 나는 이 '서성거림'만이 언어의 인장이고 사물의 진정한 형상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기울어진 식탁에서 잠시 멈춘 오렌지처럼 말(言)은 기울어지고 멀고 어두컴컴하지만...... 그때 여자는 곰팡이 냄새로 가득한 기록물보관소에서 자신의 식어버린 혓바닥을 꺼냈다. 북쪽 해변 모래 숲에는 아직도 눈사람이 녹고 있을 거라 속삭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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