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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분필을 들고 1
01화
칠판을 두드리며
2023.11.01. 수
by
고주
Nov 5. 2023
첫 출근을 마중하는 들풀 같은 아내
너무 어두워 발 헛디딜 것 같은 금정역
불 끄러 가는 사람들인가?
휘휘 바람 소리가 들린다.
혹 어려움이 있을지 몰라 동선을 점검했건만
수인선으로 갈아타는 수원역에서 완전 촌놈 되었다.
완치된 지하도 공포가 다시 살아난다.
월요일에 답사했지만
갈 때는 버스
올 때는 전철이었으니
시험에도 안 나오는 공부한 셈이다.
매탄 권선역에 내려
떨어지는 낙엽 속도보다 몇 배는 빠르게 뛴다.
집에서 나온 지 1시간 하고도 20분
그래도 1등이다.
수업 시간 1분 전이라는 방송은 목도 안 쉬는지
세 번째 바뀌는 수학 선생님이란다.
미안하다고 했다.
아이들은 덩치가 말 만하다.
더군다나 남녀가 함께 섞여 있는 모습은
보리밥에 설탕 뿌려 먹는 것처럼 어색하다.
점, 선, 면, 다각형, 대각선, 각, 내각, 외각.....
줄줄이 정의들을 물어본다.
꿀 먹은 벙어리
알면서도 쉬 대답하지 않는 영감
대답하고 싶어도 아는 것이 없는 까불이
하는 말마다 말 따먹는 초랭이
세상 초월하고 선경에 든 도인
모르는 것이 없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연신 끄떡여주는 분투하는 나 같은 놈
“올 2월에 36년의 교직 생활을 마치고 학교를 떠났습니다.
쉬면서 많이 생각했는데,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학생들과 함께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10년 만에 분필을 듭니다.
강 선생님으로부터 인수인계를 받았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중학교 1학년이 푼다고요?
수학포기자를 만드는 현실에 분노를 느낍니다.”
여기서 우레와 같은 박수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그렇게 해서 n각형까지 대각선의 수와 내각의 합을 구하는 공식을 유도한다.
수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세상의 모든 현상을 수식으로 바꾸고 규칙을 찾을 수 있다면, 일반화할 수 있다면 과거, 현재, 미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려운 문제에 매달리지 말고 용어의 정의와 특별한 경우에서 일반적인 법칙들을 찾아내는데 관심을 가집시다.
수학 절대로 어렵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또, 한번 거의 죽음이다.
자전거를 타듯이 수영하듯이 강의도 녹슬지 않는다.
혼자 작두를 타며 땀을 뻘뻘 흘린다.
입술이 타다 말려 올라간다.
이렇게 황홀할 수가.
양갈비 미역국 샐러드 김치 감자볶음 증편
매월 1일은 생일상이란다.
중학교 1학년이라 자유학년제다.
주제 선택이 제일 골치 아픈 것이라고 했다.
다섯 개 반에서 희망자를 모았다는데 당나라 군대다.
모란시장은 저리 가라다.
준비해 간 동영상은 와이파이가 뜨지 않아 무용지물
귀신영화를 보여주다 결국 입으로 때웠다.
골이 흔들린다 .
하필이면 1일이라 교무회의가 있다.
인사 말씀을 준비하라는 교무부장님의 귀여운 엄명
“노는 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내 인생에서 언제가 제일 행복했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이들과 수업할 때였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퇴직 전 10년 동안 아이들과 교실에서 만나는 위치에 있지 못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여건만 주어진다면 한 10년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여기서도 박수
오늘은 박수만 받고 끝난다
내일이 더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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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를 신으로 모시는 고주망태입니다. 36년의 교직생활을 잘 마무리하고, 이제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 싶은 영원한 청춘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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