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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한가운데에서

2023.11.07. 화

by 고주

쓸고 가는 바람

미련 외로움 같은 것까지

데려오는 바람

쓸쓸함 그리움까지

집 앞 학교 담을 오르는 계단

혼자서 뜨는 해를 바라봐야 하는

하늘을 찌를 것 같은 건물 사이로

터진 둑 주체할 수 없는 물을 따라

휩쓸리는 미꾸라지처럼

군단으로 밀려오는 전사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첫 음은 흘려버리는 남의 나라말

알아들어 보겠다고 씩씩하게

바라보고 걷는 노병

힘내라 힘

전철을 기다리는 사람들

쭉 늘어서서

하늘로 오르려는 듯 엄숙하게

체념한 듯 허탈하게

흔들리면서도

정해진 곳을 따라

또 다른 정해진 곳으로 간다

가만히 앉아 엉덩이에 굳은살 키우는 것보다

걷고 또 걷고

오르고 내리면서

두 다리 근육을 키워볼까나

30분이야 전철이 알아서 할 일이고

1시간은 적당한 운동

따로 산으로 들로 가지 않아도 되겠다

돌아올 때 또 한 시간

귀로는 세상 휘저으며 나갈 무기를

눈으로는 허락받지 않은 변화를 찾아내고

머리로는 어떻게 엮을까 뒤적이며

한적한 건널목 빨간불은 못 본 척 지나가고

무시하며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

따라가지 않으면 그 사람 난처할까 봐 걸음 하나 보태고

한 시간의 작은 여행

계절을 맞이하며

단풍과 함께 물들어가며

시절에 스며든다

하나가 된다

곧 눈발로 쏟아질 것이다


달 말 수행평가 전까지 도형을 마쳐야 한단다.

주당 3시간으로는

발에 땀나도록 달려야 한다.

있는 기술 없는 재주를 다 털어도

“졸린다.”

애꾸가 된 사과 소녀는 한숨을 쉰다.

수학은 수학인가 보다

다른 묘수를 찾아야 한다.


점심을 먹고 운동장을 한 바퀴 도는데

자전거들이 사이좋게 머무는 곳

야! 좋다.

무척 비싼 것들이겠다.

길지는

앞으로는 강

뒤로는 산이라 했는데

요즘 명당은

앞으로도 뒤로도 옆으로도

근사한 아파트여야 한다.

사랑은 받아본 사람이 준다고

밝고 긍정적인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행복하게 사는 학교

부자가 죄는 아니지만

어렵고 힘든 가정의 아이들은

칡뿌리처럼 얽히고설켜 하늘 보기도 힘들다면

대물림

나면서부터 갈라진 삶

슬퍼진다.

나야 따뜻한 아이들과 편하게 살아가기는 하지만

자꾸 뒤돌아보며 주춤거리는 것은

그 먼바다가

바다와 함께 기다리는 밤 같은 학교와

짱뚱어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이 있을

그곳을 기다리는 것이다


옆자리의 정보부장님이 아이들의 시가 묶여있는 책을 내민다.

원하는 분위기와 주제를 AI에게 넣으면 시가 바로 나온다나.

그것에 자기만의 색과 어울리는 단어를 입히면 훌륭한 작품이 된단다.

배경 그림은 이미지를 선택하면 골라준다나.

맥 빠진다.

함께 가야 하지 않겠느냐며 가르쳐 주겠단다.

배워보기는 해야겠다.


입체도형을 하는데

책으로만 하느냐며 약간 불만 섞인 목소리 자식

원하는 진도를 마치면 보충 문제를 하겠다고는 했지만

너도 수포자의 길로 가는가 싶어 안쓰럽다.

제발 내 말 좀 들어라.

정의와 공식 유도 과정을 잘 이해하라고.

36년을 고민하고 시행착오를 거쳐 내린 결론.

내 말만 좀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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