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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영 Sep 14. 2024

남편과 아이 그리고 나를 분리하기.

각자 본인의 팔자대로 살도록 놔두기.

집안일은 아무리 해도 티가 안 나고,

육아는 잘되면 본전이고 안되면 내 탓이다.

전업주부가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일이 많이 없다.

적당한 성취가 있어야지 자존감이 충전되는데

그럴 수 없으니 자존감이 바닥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이들의 성적이 나의 성적이 된다.

남편의 승진이 나의 보상이 되었다.


거기에 성취감을 느끼게 되어서 점점 더

아이들과 남편에게 집착했으며, 통제를 시작했다.
 아이들의 높은 성적을 위해서 더 많은 학원에

보내게 되었고, 남편의 승진을 위해서

남편에게 더 많은 기대를 했다.  

   

그게 맞는 건 줄 알았었다.

나의 주변에 엄마들도 다 나와 같은 목표였다.

대화 내용도 아이들 학원 이야기, 교육 이야기,

남편 이야기뿐.

나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이 성적이 잘 나와서 SNS에 올리거나,

슬쩍 흘려서 칭찬을 받으면 내가 잘한 거처럼

인정받는 느낌에 중독이 되었다.   

  

나는 후줄근한 티셔츠를 입고 다녀도 남편과 아이들이 좋은 브랜드의 옷을 입고 다니면 상관없었다.

그때는 그들이 나의 브랜드였으니까.     

그렇게 점점 더 나는 없어지고, 나의 자존감이

채워질 일이 없었다.


자존감이 비워진 나는 늘 우울증 약으로

채우고 있었다.

    


어느 날 우울증 약을 받기 위해 정신과를 내원하였고, 진료 기다리다가 한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 아주머니 역시 전업주부셨고,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고 계셨다.

아주머니의 남편은 대학교수. 자녀들은 누가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 대학교에서 유학 중이라고 하셨다.

아주머니는 그동안 나와 나의 주변 엄마들이 향해 가고 있는 목표를 이미 이루신 훌륭하신 분이었다.

하지만 눈이 왠지 슬퍼 보이셨다.


그분의 삶은 내가 모르지만,

나는 그분에게 내 모습을 투사하고 있었던 거 같았다.     

그분 역시 자신을 잃고 살았다고 감히 생각했다.


그냥 그분과 이야기를 하는데, 부럽다는 마음보다 이대로 나를 버리고 살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원하던 삶이 이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 후로 나는 더 이상 나의 자존감 올리는데, 남편과 아이들을 이용하지 않기로 했다.


점점 더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늘리게 되었고,

아이들의 교육에는 기본적인 것 말고는

나의 관심을 줄여나갔다.


그렇게 남편과 아이들에게서 나를 독립시켜 나갔다.     

그럴수록 신기한 것은, 내가 관심을 줄였는데도

아이들의 성적은 생각보다 떨어지지 않았고,

남편과 아이들의 표정이 오히려 더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나의 자존감을 위해서 그들의 인생을

이용하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

내가 나의 인생을 버리고, 그들의 인생을 대신

살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마음에

괜스레 미안해졌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남편과 아이들은 본인의

팔자대로 살고 있었을 뿐이다.

남편과 아이들의 팔자를 쥐락펴락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그들은 그들이 팔자대로 살도록 놔두고

내 팔자나 잘 살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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