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과 함께라면 더 좋겠지만
2025년 7월 10일 목요일
1. 조금 느려도 괜찮아, 여유로운 일상
다양한 PMS의 세계에서 루나씨의 생리 전 증후군은 무기력이다. 어젯밤에는 3시간 가까이 아무 생각 없이 유투브를 훑다가 새벽 1시에 잤다. 그래서 더 피곤한 오늘 아침에는 늘 먹던 달걀이나 사과가 아니라 따끈한 밥이 당겼다. 메르카도나에 다녀와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즉석밥과 달걀, 베이컨을 먹었다.
구글이 알려주는 실시간 버스 정보가 안 맞기 시작했다. 딜레이가 많은 알리칸테 버스, 좁은 일방통행길을 요리조리 빠져나가야 하는 노선에서 중간에 자동차 한 대라도 비상깜박이를 켜고 있으면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는 동네이다. 수업에 5~10분 정도 자꾸 늦게 되는데, 다행히 다들 아무렇지 않은 듯하다. 시간 약속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스페인에서는 안 그래도 될 것 같은 분위기가 맘에 든다. 의외로 선생님도 적당히 늦게 오는 경우가 종종 있고, 대신 수업 마무리하는 시간도 끝인사하고 다음 계획 이야기하다 보면 슬금슬금 늦어질 때가 있다. 강렬한 태양의 영향 아래 느긋한 라이프스타일을 이어 온 스페인 특유의 문화인 듯하다.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 하면 심장이 뛰는 강박을 가지고 있는데, 여행을 하다보면 꼭 그렇지 않아도 된다는 여유를 배우게 된다.
스페인어 공부 중에 리딩 파트가 가장 적성에 잘 맞는 것 같다고 말했더니 선생님의 대답, “당연히 말하는 것보다 이해하는 게 더 빠르죠.” 아, 그러네요, 역시 리딩만 하고 싶습니다만. 그건 불가능하겠지. 듣기, 말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아닌 척 하지만 매수업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무 것도 몰라서 꼬부랑 글씨를 바라보기만 하던 시절은 지났다는 것이다. 초급 수준이기는 하지만 꽤 길어보이는 글도 모르는 단어 몇 개 정도만 해결하면 수월하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매일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
2.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해서 출근하는데 1시간 30분이 걸린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읽었다. 스페인어 수업을 하면서 자꾸 듣기나 읽기 대본에 몰입하게 된다. 누군가에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 굉장히 슬퍼졌다. 루나씨도 서울 살던 시절의 대부분에는 만원버스를 두 번씩 타고 출근했었지. 하지만 1시간 반은 너무 심하네요. 또 다른 이야기는 비행기와 택시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 어떤 회사의 매니저 이야기였다. 엄청 큰 회사에 엄청 중요한 사람인가 봐요, 라며 선생님과 함께 웃었다. 한국에도 정부청사가 세종으로 옮겨지는 바람에 서울에서 세종까지 KTX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주도의 경우에는 30분이 넘어가면 이동하기 꺼려하는 도민들이 많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실제로 제주에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평일에 1시간 이상 운전해서 성산에 유채꽃을 보러 가기도 했었는데 어느새 제주살이 삼 년 차쯤 되었을 때는 구제주에서 신제주로 20분 정도 운전 하는 것도 뭔가 너무 멀리 가는 느낌이 들어서 피곤해지곤 했었다. 즐거웠던 제주살이, 흥미로운 제주도민들을 떠올려보았다. 스페인어 공부도 좋지만 이렇게 종종 스페인과 한국의 문화, 제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즐겁다. 지금은 영어로 말하지만 스페인어로도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제발.
3. 로컬시장에 가다
어제부터 알리칸테 3년 거주 경력에 빛나는 J의 추천이 아주 유용하다. 주 2회만 연다는 로컬시장에 가 보기로 했다. 구글이 알려주는 대로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안내문을 곰곰이 살펴보니 목요일과 토요일만 운행하는 버스였다. 목요일과 토요일에만 열리는 시장 일정에 맞추어서 버스가 운행되고 있는 것이다. 돌돌 끌고 다닐 수 있는 장바구니를 하나씩 가진 할머니들이 버스 정류장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현지 할머니들이 이렇게 많이 가시는 걸 보니 아주 좋은 시장에 가는 길이군, 생각하며 안심했다.
그렇게 도착한 메르카디요 뗄루아다는 뻔하디 뻔한 로컬 시장일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굉장히 재미있었다. 다소 붐비는 시장이라서 소매치기가 있을까 봐 잔뜩 긴장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인구 밀도가 낮아서 바르셀로나 같은 대도시보다는 소매치기의 위험이 훨씬 낮은 것 같다. 물론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을 눈여겨보며 조심하는 것은 잊지 않는다. 신선한 과일과 채소, 의류와 신발, 각종 향신료와 약품(?) 등 소위 없는 게 없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시장이었다.
스페인어 공부에 공책이 필요했는데 문구를 파는 곳도 있었다. 너무 두꺼운 공책들이 많아서 아주 얇은 음악 공책을 골랐다. 오선지가 그려져 있지만 어쨌든 무언가 쓸 수 있는 종이가 있으면 되니까. 작은 음악 공책의 가격은 50센트였다. 굉장히 싸다. 내가 잘못 들었나 해서 신쿠엔따? 신쿠엔따? 반복해서 질문했다. 지갑을 열었는데 하필 동전이 40센트밖에 없어서 “Yo tengo 40 centos(40센트 있어요.)” 라며 애매한 웃음을 지어 보였더니, 인상 좋은 사장님이 친절하게 말한다면서 깎아주셨다. 아주 합리적인 소비였다. 신난다.
4. 오랜 여행의 끝에는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여행을 질리도록 하고 있다. 장기여행하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
이제 어딘가에 정착하게 되면 제 자리에 머무르게 될 것 같다.
역시 나이의 문제인가, 결국 체력의 문제인가, 또는 사람의 문제인가.
늘 답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시간이나 장소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내미는 손길에 머무른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 살고 오래 여행할수록 사람을 사랑하고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편안한 삶이자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난 인간이 싫지.
안타까운 일이다.
5. 쇼핑, 필요한 건 잊고 원하는 건 잔뜩
Decathlon에 가려고 했으나...
아프리카 여행을 준비하기 위해 침낭을 사러 데카트론에 가다가 우연히 발견한 아울렛에 다녀오게 되었다. 버스 정류장 바로 앞에는 갑자기 아시안 마트라는 간판이 달린 만물상이 있었는데 파라솔부터 양말, 속옷, 문구류까지 없는 게 없는 곳이었다. 여행이 길어지다 보니 발이 아파서 자주 운동화를 신기 때문에 추가로 필요한 양말을 구입했다. 길 건너편에 있는 아울렛은 매우 단순한 곳이었는데 의외로 세일하는 물품들이 많아서 수영복과 바차타 수업을 위한 컨버스 운동화와 선스프레이를 구입했다. 더운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의외로 선블록 제품이 가장 비싸다. 스페인어 수업이 끝난 후 로컬 시장에 들렀다가 아울렛 투어까지, 피곤할 만큼 쇼핑에 몰두한 날이었다. 결국 데카트론에는 갈 시간이 없어서(!) 사려고 계획한 건 못 사고 돌아온 날, 아울렛 앞에는 트램역이 있어서 우연히, 처음으로, 트램을 타 볼 수 있었다.
6. 엄청난 도전, 스페인어 그룹 수업에 참여하다
오후 6시부터는 첫 번째 스페인어 그룹 수업에 다녀왔다. 1:1 수업을 신청한 학생도 일주일에 1번 그룹 수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이네스, 학생들은 우크라이나에서 온 J와 V 부부, 미국에서 온 H, 베트남에서 온 A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궁금한 게 있는지 질문해 보라며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전혀 아무런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질문을 떠올리는 게 쉽지 않았다. 준비 없이 와도 된다고 안내받았는데 말이죠;;; 게다가 사적인 질문은 전혀 하고 싶지 않거든요. 더불어 스페인어로 질문해야 하는데 그룹으로 이야기를 해 보는 건 처음이라서 숨이 막힐 만큼 막막했다. 스페인어 수업 겨우 5일차, 마르티나 선생님과는 나름 필요한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엄청 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룹에 들어가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카훗 퀴즈를 했는데 내가 꼴찌라니! 내가 꼴찌라니! 수업시간 내내 너무나 긴장되고 무섭고 멍청한 기분이 들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마르티나 선생님을 만났는데,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너무 어려워요, 라며 징징댈 수밖에 없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1년 가까이 그룹 수업을 하고 있는 학생들이라고 했다. 어째서 이렇게 어려운 그룹에 나를!!! 마르티나 선생님은 내가 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던 것 같다. 선생님의 믿음과 기대 감사합니다. 하지만 너무 어려웠어요. 빨리 스페인어를 잘하고 싶다. 의지가 불타 오른다.
아, 오늘 자기소개 하는 중 제주도에서 살았던 얘기하면서 습도가 90% 가깝다고 하니 아무도 믿지 않았다. 현재 알리칸테의 습도는 검색해 보니 60% 정도라는데 실제 사는 동안에는 그렇게 습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 바다에서 멀면 더 건조해지는데 습기보다 햇볕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조한 나라에서 온 수강생들은 알리칸테가 너무 습해서 힘들다고 했다. 제주도의 습도를 아무도 믿지 않아서 결국 구글 검색을 했어야 했는데, 현재 습도가 88% 라서 모두가 놀라워했다. 제주에 살 때도 서울에 살 때도 습도가 높아서 스페인보다 여름을 보내기 훨씬 어려웠던 기억이 있다. 물론 남부 유럽의 햇살은 남다르긴 하지만.
잊지 말아요, 7월, 8월에 남부 유럽 추천하지 않아요, 차라리 겨울!
밤 9시에는 두 번째 바차타 수업에 다녀왔다. 스윙댄스와 바차타를 둘 다 아는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 남들 다 제자리 찍을 때 나만 한발 더 나가고 있어서 강사님 두 분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스윙 댄서의 모멘텀 습관 고치기가 쉽지 않았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스윙댄스는 팔뤄가(보통 여성) 계속 움직이는 게 중요하고 바차타는 팔뤄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계속 움직이는 게 익숙한 스윙댄서 루나씨는 2시간 수업 내내 마지막 한 스텝을 절대 맞출 수 없었기 때문에 춤 빨리 배운다고 자랑스러워하던 사람으로서 꽤나 수치스러운 시간이었다. 강사님의 어이없는 표정, “얘는 답이 없겠는데?” 뭐든지 연습하다 보면 나아질 거라고 믿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스페인어 개인 수업에 쇼핑에 그룹 수업에 바차타 클래스까지 오늘도 바쁜 하루였네.
7. 뭐 먹고 살지?
여행에 대해 특별히 고민할 것이 없고 한달살이 생활이 안정되면서 고질적인 질문, 뭐 먹고 살까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지금 고민할 필요도 없는데 생각이 멈추지 않길래 그냥 뭐라도 시작해 보기로 했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유유히 흘러가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