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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머리 지도

《수평선에 새긴 이름》

밥상머리 지도


우재(愚齋) 박종익


고양이 풀 뜯어 먹는 소리 들린다

외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내가 아는 외국어는 몇 줄 안 되는데

군입에 이삭으로 겨우 떨어져 나온

낱알 같은 말

고국이 그립습니다


세계여행을 하다 보면

입에 가시가 돋아나고

끼니를 건너뛰면 힘이 든다

오늘은 메뉴를 고르지 않아도

외국말 몰라도

입맛이 돈다


명태는 러시아말을 하고

암탉은 브라질어로 말을 건다

연어는 노르웨이말을 하며

아픈 다리를 주무른다

홍어는 칠레 바닷가쯤에서

어촌 방언을 흘린다


내 밥상에는 매번 지도가 바뀐다

돈 있을 때는 소가 영어를 하고

돈 없을 때는 멸치가

베트남어까지 한다

입속에 들어온 참기름이

만주 바람을 일으키며

미국에서 온 콩기름을 타박한다


밥상은 언제나 야단법석이다

간혹 국적 불명일 때는 불안하다

떳떳하지 못한 것들은

제 이름을 숨기는 법

민낯을 하고도 시치미를 떼면

헷갈린다

불법체류자 같은데

입속 어금니에 씹혀봐야

말을 건네온다


그래도 온갖 나랏말싸미

침샘의 세례를 받아

속이 편안해지는 날엔

밥상머리 지도는

지구 평화를

기가 막히게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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