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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플라스틱

《수평선에 새긴 이름》

좀비 플라스틱


우재(愚齋) 박종익


오늘 나는 여지 없이 죽는다

탕~하고 쓰러진 것이다

붉은 동백꽃이 낭자하고,

정신은 아뜩하다

아침에 버린 플라스틱 접시에서

검은 연기가 지구 한 바퀴를 돌아와

뒤통수에 대고 방아쇠를 당긴다

말하자면 방향을 모르고 날아다니는 총알이

방향을 알아차릴 수 없는

구름이나 햇살의 목숨을 거두어 간다


빙하가 제 몸 허물고,

태풍은 종잡을 수 없는 곳에 대고

칼바람을 휘둘러 대곤 했다

때때로 검은 물살이 종횡무진 몰려와

세상의 모든 지붕이며 어깨 위를 덮치기도 한다


저 그림자의 주인은

먹구름이 아니고 동백꽃도 아니고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부스러기 한 점이

잿빛 안개로 자라나고 무지개로 일어서고

검은 빗방울을 만들며 산으로 강으로

오늘 아침 밥상에 오르기도 한다

누군가 함부로 버린 플라스틱이

체세포 분열을 하며

조각조각 들불처럼 살아나

천년만년 지구의 흉악범으로 떠돌며

살아 있는 것들을 모두 죽이려 든다


어느 백 년을 더 살아도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다

이제는 검은 연기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저 총구의 방향을 모른다는 사실이

더 두렵고 살 떨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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