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이 골드미스가 되어가는 그녀의 스토리 - #5
#5
평범한 남자랑 결혼하고 싶어요.
이야기로만 전해듣던 상담실은 작지만 고급스러웠다. 분홍색 스커트 정장을 프로페셔널하게 차려입은 매니저는 깍듯하게 인사하며 은경이의 확실한 신뢰를 얻었다. 처음해보는 상담이었지만 매니저의 노련한 가이드로 봇물터진 듯 은경이가 연애 경험을 쏟아냈다.
상담은 은경이 스스로 자기 취향을 깨닫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뚱뚱한 것을 혐오한다. 차라리 마른 것이 낫고 머리가 크면 호감이 안 생기더라. 키는 어느 여자와 마찬가지로 큰 것이 좋지만 160cm도 안되는 은경이 입장을 생각하면 172cm 정도만 넘으면 될 것 같다. 또 나이도 있으니 남 부럽지 않은 결혼 생활을 위해 돈도 어느 정도는 벌어야겠구나 싶다.
무엇보다 비서 일을 하는 은경의 연봉이 엄청 오를 일이 없기 때문에 직주 근접이 가능하면서 현대 도시인의 기본적인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면 서울이나 멀어도 수도권에 집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이왕 얻는거 물가상승까지 고려하여 전세나 매매로 하려면 기본적인 벌이는 있어야 한다.
물론, 은경이가 그렇게 잘난 것은 아니다.
3천만원 대의 나이에 비해 소소한 연봉, 승진이 거의 없을 직업, 30대 후반의 나이, 쓰다보니 많이 못 모은 별볼일 없는 자산, 그래도 인서울 중간급 여대를 나와서 학력은 봐줄만 한거 같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은경이는 자신이 너무 하찮은 여자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것은 평생을 좌우하는 배우자를 찾는 결혼에 대한 이야기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 자신의 결혼 상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은경은 매니저가 쉬운 성공을 위해 자신의 노하우와 정보력을 무기로 자신을 후려치기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녀와 이야기하면서 스스로 작아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이건 은경의 평생이 걸린 결혼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쉽게 양보할 수 없었다.
“저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는 평범한 남자를 원해요. 또 아이도 갖고 싶으니까 나이는 저보다 6살까지만 많았으면 좋겠어요. 아래로는 10살까지요. 돌싱도 사람 괜찮고 수입이 좋으면 상관없어요. 하지만 남의 아이는 키울 자신이 없네요.”
상담을 시작할 때 느껴지던 훈훈한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눈 앞의 매니저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매서웠다. 한발짝 한발짝 서로의 숨통을 죄이며 양보없이 계약의 우위를 점하고자 원하는 조건을 이야기 했다.
“은경씨 얘기를 들어보니까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 조건이 쉽지는 않아요.”
“저… 눈 그렇게 안 높은데…제 조건 정도 원하는 여자들 꽤 많지 않아요?”
“그래도 은경씨가 원하는 그런 분들은 그 정도 나이면 다들 결혼을 하셔서요. 일단 우리 우선순위를 좀 정해볼까요?”
“그래요?...”
은경은 매니저의 ‘그 정도 나이면 다들 결혼하셔서요.’라는 말에 기분이 조금 우울해졌다. 뭔가 정가에 못 팔려 떨이가 된 기분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괜찮았던 과장님들은 다들 유부남이었다. 완전히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말도 어느정도 일리가 있으니 일단 우선순위를 정하기로 했다. 어쨌든 결혼을 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으로 은경은 웃음이 사라진 표정으로 순순히 매니저의 질문에 대답했다.
“저는 뚱뚱한건 못 참겠더라고요.”
“그렇군요. 그럼 뚱뚱한 것 보다는 차라리 마른 것이 낫다?”
“그런거 같아요. 그리고 대머리면 유전적인 것도 걸리고 보기에도 너무 나이들어 보여서 안 될 것 같아요.”
“은경씨는 외적인 요소가 중요한가 봐요. 그럼 혹시 수입 기준은 좀 낮아져도 될까요?”
“제가 많이 버는 것도 아닌데… 40대나 되서 이정도는 다들 벌지 않으시나요?”
“은경씨 당연히 최대한 좋은 분으로 매칭시켜 드릴거지만 기준이 좀 넓어야 많이 보고 고를 수 있어요.”
은경은 기분이 급격히 다운됐다. 이제보니 상담실은 싸구려 인테리어 업체에서 시공을 했나보다. 그리스 로마 신전의 기둥을 모티브로 한 구조물 구석이 뜯겨져 말려 있는 것이 눈에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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닿을 듯, 말 듯 멀어지는 협상의 고지에 은경의 마음은 답답해져 갔다.
좁은 상담실에서 맺어야 하는 결혼이라는 여정의 출발은 너무나 중요하다. 특별히 대단한 노력을 한 것은 아니지만 혼자서는 남자랑 말 섞는 것조차 못해온 세월이 한참이라 이제 자력 구제의 상태는 넘은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다. 은경의 결혼인데 원하는 대로 배우자를 고를 수 없다는 것이 실망스럽지만 도와줄 사람은 매니저밖에 없기에 그녀의 말을 조용히 듣는다.
“제가 보기에 은경 씨가 남자를 아주 많이 만나보지는 못해서 진짜 결혼을 위한 이상형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들은 현실에는 없거든요. 있어도 얼마나 치열하겠어요. 결혼이라는 게 인생을 함께하는 건데 일단 은경씨 마음이 편해야 좋은 결혼인 거죠.”
“그건 그렇죠. 저도 실제로 만나보면 좀 다를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해요.”
이 또한 사실이다. 은경이의 경험은 사실 6년 전 있었던 7개월의 연애가 전부이다. 그녀 말대로 39살이 될 때까지 주로 드라마나 연애물을 통한 간접 연애만 했으니 실질적인 자기 이상형을 모를 수도 있다. 여태 남들이 써놓은 이야기 속 남자주인공에게 흠뻑 빠져 그런 인생을 당연하게 여기고 기다리기만 했으니 전문가인 매니저에게 치부를 들키는 것이 당연한 것도 같다.
“그럼 은경씨 말대로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 외적인 부분을 맞춰 보면서 좋은 분으로 만나보기 시작할까요? 자꾸 망설이시면 시간만 가요. 남자분들은 아무래도 나이를 많이 보시거든요. 외적인 부분에서도 나이에 따라 여자들은 많이 달라지기도 하고… 다시 어려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얼마예요?”
매니저가 물어보기도 전에 은경의 입에서 오늘의 상담을 종결 짖는 질문이 나왔다. 그러자 매니저는 상담을 시작할 때 보여주었던 동경하는 대학교 선배 같은 따뜻한 미소를 보여주며 ‘프로그램 가격표’를 꺼냈다.
“제가 은경씨는 꼭 성혼시켜드리고 싶어서 10% 할인된 가격으로 해드릴게요. 아시겠지만 이건 특별 할인이라 지금 여기서 결제하실 때만 가능해요.”
“할부는 몇 개월까지 돼요?”
은경이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할부금이 걱정되었지만 결혼만 할 수 있다면 이 정도 금액쯤은 앞으로 그녀가 누릴 인생에 비해 싸다는 생각으로 과감히 신용카드를 긁었다.
망설이면 시간만 간다. 여자한테는 나이가 깡패라는 결혼시장에서 이미 늦게 출발선에 서버린 은경은 마음이 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