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졸업 당시
큰누님께
'파카 만년필'을 선물 받았다.
아마
국문학과를
입학하기에
글을 쓰라는 뜻일 게다.
허나
그 후 45년간
한 줄도
제대로
쓰지 않았다.
이제사
글을 쓰려하니
펜촉이
녹슬었다.
누님께도
만년필에게도
미안하다
ㅡ
고등학교
졸업식의 기억은 희미하나
그날 받은
선물 하나만은
또렷하다.
큰누님의 손에서 전해진
파카 만년필,
그 깊은 뜻을
이해하기엔 나는 너무 어렸다.
'글을 써라, '
누님이 건네는 눈빛이
그러했다.
만년필을 받아 든 손은
떨렸고,
마음은 벅찼으나,
젊음의 불꽃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문학과의 문턱을
넘으며,
그 만년필은
책상 서랍 한 켠에
고이 모셔졌다.
가끔 서랍을 열 때마다
촉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쓰지는
않았다.
일기장 한 구석에
‘오늘도
쓰지 않았다’는
내용의 일기만이
가득했다.
흘러
45년.
나는
이제야 문득
만년필을 손에 쥐었다.
누님의
기대,
만년필의 존재,
그리고
내가 꿈꾸던 글쓰기의 열망이
마음 한구석에서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이제사
글을 쓰려하니,
만년필의 펜촉은
오랜 무사용으로
막혔고,
내 마음도
그와 같이 막혀
있었다.
만년필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오랜 시간
나를 기다린 채,
한 줄의 글도 써보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잠들어 있던 그에게.
누님에게도
미안함이 밀려왔다.
그분의
선물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그분의 기대를
저버린 것 같아서.
이제,
45년의 침묵을 깨고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만년필의 펜촉을
깨우고
내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기로 했다.
늦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누님이 말씀하셨듯
'글은
언제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예술'이라고.
만년필을 손에 쥐고
첫 글자를
써 내려간다.
ㅡ
나는
누님과
만년필에게 속삭인다.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이제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