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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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하는 날
최상희
찬바람이 매섭게 부는 초겨울, 합천 마당 한편에 김장 준비가 한창이다. 85세 언니가 정성껏 가꾼 배추와 무, 갓, 파가 탁탁 손에 잡힐 때마다, 우리는 오래된 가족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커다란 고무대야에 담긴 배추는 소금물 속에서 고개를 살짝 내밀고, 남매들은 저마다의 손길로 잎을 뒤집으며, 짜릿한 절임 향을 맡는다. 어느새 손끝이 시려지지만, 장갑을 끼는 건 금기다. 손으로 직접 만져야 간이 잘 배고, 그 맛도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김칫소를 넣어 한 장 한 장 정성껏 버무릴 때면, 돌아가신 부모님이 떠오른다. 어릴 적 어머니가 "이렇게 해야 속이 꽉 차고 맛있다"라며 손수 보여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이제는 언니가 그 손길을 이어받아 김장을 진두지휘한다.
“자, 한입씩 맛 좀 봐라.”
언니가 담근 배추 속을 뜯어내어 건네주면, 모두들 입안에 쏙 넣고 음미한다. "음, 올해는 배추가 참 달다." "고춧가루를 넉넉히 넣었더니 매콤하니 좋네." 이런저런 감탄이 오가며, 김장독은 점점 차오른다.
한쪽에서는 커다란 가마솥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삼겹살이 푹 삶아져 나오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남정네들이 자리를 잡고 앉는다. 탁주 한 사발을 들이켜며, 뽕짝이 흥겹게 울려 퍼진다.
"나도 한 곡조 뽑아야지!"
누군가 손뼉을 치며 일어서자, 모두들 박수를 치며 장단을 맞춘다. 웃음소리가 마당 가득 번져간다.
김장을 마친 뒤, 모두가 손에 묻은 양념을 훔쳐내고, 김치 한 통씩 품에 안는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내년에도 꼭 다시 모이자" 다짐한다. 8남매 중 다섯이 떠난 자리지만, 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함께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차 안에는 김치 향이 가득 배어 있다. 뒷자리에 실린 김치통에서 새어 나온 양념 냄새가 온몸을 감싼다. 김장하는 날의 풍경이 눈앞에 다시 떠오른다.
"부디 언니가 건강하셔서, 내년에도 또 만나자."
마음 깊숙한 곳에서 작은 기도를 올리며, 뿌듯한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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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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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희 작가의 '김장하는 날'은 풍경 묘사를 넘어, 가족의 연대와 전통의 가치를 되새기며 삶의 철학을 담아낸다. 작가는 김장을 단순한 음식 저장의 행위가 아니라, 가족이 모이고 관계를 나누는 매개체로 바라본다. 이는 그녀의 삶의 철학이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시하고,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인간적 온기를 지키려는 태도를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품 속에서 '전화 한 통이면 김치가 배달되는 시대'와 '온 가족이 모여 직접 김장을 하는 전통'을 대비시키는 방식은, 편리함과 정(情) 사이에서 무엇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작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점 희미해지는 가치들에 대해 애틋한 시선을 보내며, 손맛과 정성이 깃든 삶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그녀의 가치관은 현대화와 효율성보다 정서적 유대와 전통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흐른다.
작품의 미의식 또한 이러한 가치철학과 맞닿아 있다. 최상희 작가의 문장은 꾸밈없이 소박하고 따뜻하다. 사실적인 묘사 속에서도 감정을 절제하며, 독자로 자연스럽게 그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특히 김장을 함께하는 과정 속에서 나누는 대화와 풍경을 현실감 있게 그려내면서도, 담담한 어조로 깊은 정서를 전달한다. 이는 그녀가 일상의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김장이라는 행위를 노동이 아닌 삶의 한 장면으로 승화시키는 방식에서, 그녀의 미의식이 단순한 서정성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때 8남매가 함께했던 시절과 이제는 절반이 떠난 현재를 교차시키면서, 김장이라는 행위가 그저 음식 준비만이 아니라 세월의 흐름을 기억하고, 가족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최상희 작가의 글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은 ‘진정성’에 있다. 사라져 가는 전통에 대한 애착을 조용히 드러내면서도 감상에 치우치지 않고, 현실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유지한다. 이는 그녀가 전통과 현대를 대립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어떻게든 이어가야 할 가치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시선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최상희 작가의 '김장하는 날'은 단순한 가족 이야기 속에 그녀의 삶의 철학과 미의식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가족애와 전통을 소중히 여기며, 소박한 삶 속에서도 인간적인 따뜻함을 지켜나가려는 그녀의 태도가 작품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 현실적인 묘사 속에서도 정서를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글쓰기 방식은 독자로 공감을 이끌어내며, 잊혀가는 가치들을 되새기게 만든다.
이는 그녀가 단순한 기록자가 아니라, 삶의 깊이를 담아내는 작가임을 증명하는 미덕이다.
ㅡ 청람
https://youtube.com/shorts/kcIyU6AONwg?si=70hM9dekoj9FcKs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