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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le Cactus Apr 29. 2024

6화 오! 안젤라

트라우마 극복법



따뜻한 커피 향이 퍼지며 사람들이 휴게실로 모여든다. 안나가 새로 산 스테인리스컵에 커피를 담으며 녹지 않는 얼음을 자랑하기 바쁘다.

색깔도 파스텔색으로 연핑크부터 검은색까지 다양하다. 휴대폰으로 상품을 보여주며 주문을 받기 시작한다.  

‘검은색 어때? 그 남자랑 커플로 하면 잘 어울릴 거야 ‘ ‘글쎄…’  

‘사람이 괜찮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아픈 할머니를 모시고 알래스카로 돌아온 거라고 하던데 그래서 더 만날 거야?’

‘아마?’ ‘어머, 남자 트라우마는 사라졌나 봐?’  ‘불태우면 쉽더라고’ ‘뭐?’ ’ 트라우마는 태워버리면 끝이더라. ‘





‘안젤라는 내 할머니야’ 붉게 달아오른 남자의 얼굴에 위험보다는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앞장서는 그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걱정과 달리 화사한 방안엔 의료용 침대에 산소공급튜브를 코에 연결한 할머니가 누워 있었다. 창백하고 깡마른 노인이었지만 커다란 진주목걸이와 화려한 패턴의 원피스로 멋을 부렸다.  시끄러운 종소리는 산소통의 알람소리로 남자가 교체하자 멈췄다.

‘안젤라, 여긴 내 여자친구야‘  당황한 여자의 손을 인자한 미소로 꼭 잡았다. ’ 반가워 어떤 아시아인이지? ‘ ’ 할머니 저는 한국인이에요’ 외국에서 태어나고 살아도 피부색이 다른 것은 언제나 타깃이 된다. 야비하고 나쁜 사람들은 물론이고 인자하고 착하던 사람들도 언제나 자신의 입지가 작아질 때는 인종차별을 한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설명하지 않고 한국인이라고 말한다. 대다수의 외국인들은 한국이 아시아의 어떤 나라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질문을 원천봉쇄할 수 있다. ‘한국사람들을 잘 알지, 30년 이상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했거든 그때 같이 일했지.’  여자의 원천봉쇄는 가볍게 뚫렸다.  ‘부담 주지 마 안젤라 나랑 데이트가 먼저라고’ 짙은 스웨이드 재킷이 잘 어울리는 남자가 잔뜩 움추러들어서 말한다. ’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나는 할머니가 위독해지면서 알래스카로 돌아온 거야. 솔직히 오래 머문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너를 만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

너만 괜찮다면 진지하게 만나고 싶어 ‘ 그의 솔직한 발언에 기쁘던 마음이 갑자기 불안감으로 돌변했다.



엉성하게 자른 머리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친다. ’ 사실은 나 학생이야, 너랑 살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거야. 나랑 사귀자 ‘

통통한 얼굴에 걸쳐진 검은 뿔테의 안경이 전형적인 루저지만 여자는 싫지 않았다. 일 년 내내 입은 패딩마저 귀엽고 느껴졌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 아닌 순수한 그의 고백에 둘은 같이 살기 시작했다. 공부하는 사람을 배려하던 여자 친구는 아무 의미 없음을 알지 못했다.

’ 일 끝나면 데리러 올 수 있어? 친구랑 공부하고 있어 ‘

’ 학교에서 먹을 점심 좀 만들어줄래?‘

‘장 볼 때 아껴 써봐, 돈을 못 모으는 이유가 있을 거야’

‘빨래 좀 미리 해줄 수 없어? 학교에 입고 갈 옷이 없잖아’

‘난 미리 먹었지, 먹고 싶은 거 시켜 먹어’

‘주말에 내 사촌이 왔다고 이렇게 화낼 일이야?‘

’ 네가 가족이 없어서 모르나 본데 다들 이렇게 살아 ‘

’ 학비가 조금 모자란데 대출 좀 받아줄 수 있어? 곧 갚을게 ‘

’ 여자친구라면 이 정도 이해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여자친구에게 바라는 것이 이렇게 많다니 이 남자와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그의 노예가 되는 것인가. 내심 그가 떠난 것에 개운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그와의 생활은 이쯤 되면 트라우마라고 해야겠다.



‘네가 잊고 있는 것 같아서 한 번만 다시 말해줄게, 밑에 적어주는 주소로 내일까지 택배 보내, 마지막까지 여자로서 니 역할을 잘하길 바라’ 전남자친구의 연락이다.  자동적으로 미안이라고 썼다가 지운다. 겉옷만 벗어놓고 상자를 모은다. 그가 챙긴 짐외에도 집안 곳곳 상당한 양의 그의 물건이 있었고 깡그리 상자 안에 넣었다.



‘넌 뭘 몰라서 탈이야. 뭐든 살생각만 하니깐 돈을 못 모으지. 내 사촌 메이슨 알지? 이번에 바비큐기계 새로 사서 쓰던 것 주고 갔거든.  퇴근할 때 마트에서 고기 좀 사 와 ‘

뒷마당엔 녹이 다 슬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드럼통 하나가 보였다. 노숙자들도 안 쓸 것 같은 흉물스러운 물건이었다.

’이것 봐 이런 걸로 고기를 먹어야 딱이지 빨리 고기 가져와 ‘ 싸구려 플라스틱의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양손 가득한 여자에게 소리쳤다. 대꾸할 힘이 없어 그의 말에 따라 고기를 준비했다. ‘이런 것 먹어본 적 없지? 내가 어떻게 먹는지 보여줄게’

나뭇가지와 뒷마당의 낙엽을 넣고 바비큐용 오일을 붓는다.  싸구려 라이터로 불을 붙여 드럼통 안에 집어넣자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화라락 오른 불꽃이 따뜻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쓸모없는 쓰레기가 한순간에 생명이 되어 피어나다 사그라들었다.



자질구레한 것들 사이에 그가 매일 입던 청바지도 타 들어가고 있었다.

‘정말 이렇게 하면 잘 타네’

상자 안의 물건들을 드럼통 안에 들이붓는다. 옆에 쌓여 있는 상자를 모두 태우고 집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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