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람, 저런 사람 , 인간의 인간다운 길
'1. '일기' 파트는 작가가 하는 말 중에 내 가슴에 꽂힌 몇 구절, 문단이다. 노트에 기입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손으로 쓰는 문장은 머릿속에 박히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즐겼던 공부 방법이기도 하다.
'2. 'omg'는 Oh_hoMmage_oriGinal이다. 아주 짧게 작가가 쓴 글을 보고 나의 생각과 감정에 연결시킨다.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고 싶었다. 인간의 창작은 한계가 있다. '나'의 생각에 '작가의 생각'이 부분적으로 스며드는 것이 신기했다. 다르더라도 비교하며 즐기는 시간이 매우 즐거웠다. 독보적인 표현에는 감탄과 존경, 오마주가 있었다. 소설을 따라가면서도 멀리서 관망하기도 하고, 가까이서 등장인물의 감정에 휘말리기도 했다. 글을 읽는 모든 사람에도 그 순간을 선물할 수 있기를.
95쪽 : 그런데 편지를 끝내면서 한 가지 '기우'를 전하고자 합니다. 저의 하찮은 기자로서의 감각과 판단은 어쩐 일인지 변호사님께서 그 100억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계실 것 같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변호사님은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햇병아리 변호사이시고, 그 로펌은 그저 돈만 밝히는 닳고 닳은 노회한 백여우이기 때문입니다.
100~101쪽 : '별수 있나요. 돈은 천하무적, 절대 강자 아니던가요. 어차피 당하는 것,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더 초라해지기만 하니까요.' 손채경은 이 말을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 말을 하면 두 남자의 체면이 너무 비참해질 것 같았던 것이다. 아니, 자신의 비참함까지 피하려는 계산이었다.
115쪽 : 사흘이 지나 이태하 변호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만납시다. 사표 내고 바로 오시오."
이태하 변호사의 첫마디였다.
117쪽 : "내 이름으로 내용증명이 날아가면 정면공격이 시작되었다는 걸 실감하고 다급하게 사건 수습에 나설 수밖에 없소." -중략- "이 사건이 제소되어 그 로펌 대표가 직원의 피해 보상금을 착복한 파렴치 행위가 세상에 폭로되면 어찌 되겠소? 그 로펌까지 문 닫게 될 것이오. 더구나 내가 내용증명과 함께 민기자의 편지도 동봉할 것이오. 그럼 그 대표가 어찌 되겠소." -중략-"그뿐만이 아니오. 재판이 붙으면 증인으로 재판정에 나서겠다고 했소."
131쪽 : 이태하는 한 선배의 편지를 손 다리미질해서 다시 봉투에 넣었다. 한 선배는 대학 생활 4년 동안에 사귀게 된 가장 믿을 만한 말벗이었다. '여기 시골 생활에 아무런 불만도 불평도 없지만, 말벗이 마땅치 않은 것이 늘 아쉬운 점이오.' 한 선배의 이 말에 이태하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한 선배만 그런 게 아니라 자신도 그랬기 때문이다.
137쪽 : "그렇게 세상을 완전히 뒤엎으려고 하니까 당신이나 그분이나 왕따를 당하는 거잖아요. 같은 운동원들까지도 마땅찮아하고."
149쪽 : 소설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제시라고. 아마 작가는 독자들에게 문제를 제시하고, 그 답은 역사에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175쪽 :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자디잘게 썬 부추가 동동 뜬 푸르스름한 재첩 국물의 그 혀에 감기고 목에 스미는 기묘한 감칠맛에 젖어들고 있었다. -중략-
"아휴, 눈부셔."식당을 나선 황연주는 얼른 손차양을 이마에 대고는, "세상에나..., 저 꽃들 좀 봐. 이 눈부신 햇살에 더 아름다운 꽃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멀고 긴 강변 풍광을 보며 또 감탄하고 있었다.
182쪽 : 서울 태생들은 서울이 고향이면서도 서울에서 고향의 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날로달로 급변하는 것이 서울이기 때문에 10년이나 20년이 지나 살았던 곳을 지나칠 때면 너무나 많이 변해 버려 그곳이 어디인지 알아볼 수가 없고는 했다. 그 이질감이 서울은 고향이면서도 늘 타향이었다.
186쪽 : 돈에 얽히고설킨 재판을 계속하다 보면 돈이 살아 있는 괴물로도 보이고, 인간을 맘대로 지배하는 절대자로도 보이고, 묘한 생각에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189쪽 : 내가 꿈꾸어온 장학 재단을 설립하고 운영하려고 하는 거요. 그때 이 형의 변호사 힘이 필요 거요.
종이에 불과한 돈과 책, 그리고 편지. 그 종이를 만든 것도 사람이고, 그 종이가 만드는 것도 사람이었다. 편지를 주고받는 콘셉트가 좋았다. 손편지에는 '진심'이 들어간다는 생각에 '정말 편지의 내용이라면?' 생각하고 읽어 내려갔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도돌이표처럼 평가받는 것은 한 가지였다. 그게 무엇이든 훌륭한 삶이 되려면, 누군가가 '노터치!(no touch)'하게 하려면, 결점이 없어야 함을.. 결점은 숨겨야 함을.. 숨길 수 있는 결점을 가져야 함을.. 감정이라고 구분하고 있지만, 사실에 가까운 것들이라 마음이 아프다. 다 잘라내고 싶은 종이의 힘이었다.
2) 책을 읽고 처음으로 통쾌했다.
읽어 내려갔던 중반부만 해도 다 잘라내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결말을 보고 그런 마음을 접기로 했다. 마음을 치료하는 것도 돈이었다. 돈으로 보상을 받는 것은 상징적이었다. 누군가의 보상이 중간에서 없어지는 것은 약한 백성들을 괴롭히는 도적 떼와 다를 바 없었다. 힘으로, 돈으로, 아무리 욱여 챙기려 한들, 미세한 틈으로 돕는 이들이 있었다. 세상을 관찰하고 이야기해 주는 작가도, 그런 작가가 만든 기자와 변호사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현실에도 분명히 이런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통쾌했다. 보상은 필요 없으니 마음을 치료하라는 이태하변호사도, 꼭 보은 해야겠다며 수표를 건넨 손채경변호사도 참 멋졌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제목처럼 멋진 결말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의 차를 타고 가며 할아버지께서는 혀를 끌끌 차셨다. "산을 다 깎았어. 강도 메우더니, 이제 하나 남은 산까지 다 깎았어." 나루터에서 아파트 건설 현장, 도로 건설 현장, 그리고 지하철 공사 현장으로 바뀌어가는 세상을 보며 한탄했다. 바뀐 세상은 어리고 젊은 나에게 '누릴 수 있는 세상'이었다. 과거형으로 말하기 민망할 만큼 지금도 바뀐 세상에 대한 시각이 불편하지 않다. '어른들은 이기적이다. 좋아지는 것들을 왜 슬퍼하고 애도하고 한탄할까.'라고 생각했었다. 더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있으면서, 변하지 않길 바라는 건 '자신의 시간을 아쉬워하는 탄성 때문일 것'이라, 쉽게 예측했다. 정작 시간이 흐르고 나니 바뀐 세상에 '홀로 변치 않고 남겨진 마음'과 '앞으로 살아갈 아이들의 세상을 걱정하는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소설은 문제의 제시'라고 했던 조정래 작가의 말이 생각했다. 학교 재단에 기부했다는 기사를 찾아볼 수는 있었지만, 지역 장학 재단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혹시 '장학 재단'을 계획하고 있지는 않으실까, 아주 짧은 생각을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작가가 꿈꾸는 세상이 참 훈훈했다. 세상을 관철하고, 실천 가능한 것부터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인간다운 길'에 박수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