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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 May 30. 2024

오늘 또 다시...!

칠판 한가득 함수식을 써가며 토론을 하고 있는데 탕탕탕탕!! 무언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린다.

뭔가 싶지만 소리를 찾아 헤맬 여유가 없다. 아이와 2일 내내 싸우던 문제라 빨리 해결을 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그러자 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나 나와 1호의 사이를 가로질러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이것 봐. 내가 만들었어. 멋지지?"

쿠킹호일을 언제 가져갔는지 한통을 다 써서 얼굴만 한 망치를 만들어 자랑하며 집안을 누비고 다니는 2호다.

"너는 오늘 할 공부 다했어? 조금 있으면 잘 시간인데?"

"아~ 영어 안 했다."

영어를 하러 들어간 2호를 감시하라고 남편까지 방으로 넣어두고 1호와의 토론이 이어졌다. 이젠 조용히 집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신나게 설명하고 의논하는데 2호가 또 나타났다.

"다했다!!!"

"뭘?"

"영어!"

5분이나 지났을까? 아이는 영어공부가 끝나서 자유라며 산신령도 아니고 도비도 아닌데 은도끼를 들고 자유를 외치고 있다. 눈치 없는 이 녀석에게 레이저 눈빛을 발사하지만 이미 온몸 가득 해피바이러스를 뿜고 있는 아이에게 엄마의 레이저와 형의 눈치 좀 챙기라는 텔레파시는 튕겨 나올 뿐이었다.

"너 영어 뭐 했는데?

"본문 읽고 녹음했지?"

"문제는?"

"그건 내일 할 건데?"

"왜?"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당장 플래너 들고 와서 하루 공부시간 얼만가 계산해 보고 독서시간 빼고 공부시간이 2시간이 되도록 만들어 놓으라고 으름장을 놨다. 2시간은 당연히 될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방에 들어가 노트를 가져온 2호는 자신의 공부시간이 2시간은커녕 1 시간도 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거실 공부 7년 차라는 놈이 공부시간이 1시간도 되지 않는다니 또 순간 버럭 이가 된다. 입을 꽉 다물고 콧구멍을 넓혀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역시나 겁을 먹는 건 애꿎은 1 호고, 2호는 엄마가 숨을 쉬거나 말거나 공부시간이 늘어나는 게 싫어서 입이 오리처럼 나오기 시작했다.

"왜 2시간이나 공부해야 해?"

"인간적으로 영어랑 수학이랑 40분씩은 해야 하지 않겠어?"

"왜 40분씩이야?"

"학교에서 1교시가 40분이니까. 그렇게 학교에서 시간을 정해놓은 데도 다 이유가 있는 거거든? 전문가들이.."

말이 길어지자 2호는 자동적으로 귀를 닫고 본인 플래너를 연필로 쭉쭉 그어 불만을 표현한다. 그리곤 하는 수 없이 하루에 하나씩 하던 영어를 2개로 늘려 놓고는 던지듯 내 손에 올려놓고 방으로 도망쳤다. 억울함에 나오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 자리를 피한 걸 알지만 하던 것은 마무리 지어야 하기에 모른 척 아이를 불렀다.

아이는 울지 않은 척 눈물을 삼키고 입을 앙 다문채 내 앞에 섰다.

그렇게 30분이 지났을까? 이 녀석이 엄마한테 배웠다며 더 이상의 협상은 안된다고 여기까지만 하잔다. 아이의 말투에 옆에서 핸드폰 보며 딴짓하던 남편은 말버릇이 뭐냐며 급 불똥이 튀었고 그 여파로 아이는 찍소리 못하고 엄마의 의견대로 한 주간 공부를 해 보기로 했다.




늘 친구들보다 똑똑하고 빠른 아이. 항상 인정받고 칭찬받는 아이는 늘 이렇게 집에서는 눈치 없고 필터링 없이 말을 해서 구박덩어리가 되어 어깨가 축 처진채로 잠에 든다.


괜찮은 듯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매우 씩씩하게 굿나잇 인사를 하고는 눕는 녀석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오늘도 화가 났던 응어리가 죄책감으로 바뀌어 커다란 돌덩이로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이것도 욕심일까? 분명히 아이가 할 수 있는 양인데... 더 기다렸어야 하는 걸까?

너를 위한 거였는데, 알고 보니 또 나를 위한 거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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