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의 넓은 창문을 작품으로 만들었던 팝콘 벚꽃은 언제 피었던가 싶게 모두 사라졌다. 벚꽃이 간 자리엔 여름을 재촉하는 초록 잎사귀만 가득하다. 아쉬운 맘에 운동화를 신고 집밖으로 나가 본다. 손 끝에서 스르륵 빠져나가려는 봄의 끝자락을 움켜쥐어본다.
집 밖으로 나가자마자 아직은 끝이 아니라는 듯 보라색 레이스 같은 라일락이 반긴다. 벚꽃만 예뻐해 줘서 잔뜩 삐진 듯, 작은 연보라 꽃잎 여러 장이 힘을 모아 새침한 향을 바람에 태워 보낸다.
10분 정도 걸어 나가니 엄청난 장면이 펼쳐져서 숨이 막힐 정도다. 심지어 약간은 무지막지해 보이는 튤립군단이 끝도 없이 펼쳐있다. 노란 군단, 빨강 군단, 주황 군단, 연분홍 군단. 마치 어젯밤에 누군가 들러 물감을 쏟아놓은 것 같다. 물감폭탄에 놀란 듯 같은 색깔끼리 모여서 끼리끼리 작전을 짜는 것 같다.
라일락의 새침함 때문일까. 튤립은 이상하게 씩씩해 보인다. 색색이 아름다운 작은 컵을 올려놓은 줄기마저 튼튼하다. 며칠이 지나면 튤립도 벚꽃처럼 자취를 감추겠지. 아무리 씩씩한 군단을 형성한 튤립이라도 자연의 시간에겐 속절없이 패배하고 만다.
나도 오늘은 얼굴 주름 걱정하지 않고 자연의 따스한 봄 햇살을 맘껏 흡수해 본다. 여름이 오면 이 햇살도 부담스러울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