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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아온 오리 May 08. 2024

수술은 끝났고 엄마도, 의사도 만날 수 없었다.

친정 엄마의 1기 종양 제거 수술이 끝났다. 나는 내리는 비를 쳐다 볼뿐



자신이 집 주인인 양, 자신이 당당하게 집에 있을 권리가 있다는 듯, 휴일 내내 거실 소파에서 자리 잡고 리모컨을 차지한 남의 편 때문에 나와 아들은 일어나자마자 후딱 아침밥만 챙겨 먹고 체육관으로 차를 몰았다. 이혼 소송 중인데도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자신에게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아들 방까지 취침 방으로 차지한 남의 편 때문에 아들과 나는 5달이 넘어 가도록 휴일에 편하게 집에서 쉬지를 못했다.


비염끼에 코 알러지 현상으로 넘게 약을 먹으며 훌쩍이는 아들은 친구를 만나러 나가는 낫다며 나를 따라 나섰다. 코 땜에 몸이 피곤하고 힘들텐데도 남의 편과 둘이서 집에 있기 싫어하는 아들과 나는 아들 친구네와 만나 즐겁게 배드민턴을 치며 땀을 흘렸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주말부터 내린 비는 대체 공휴일인 월요일까지 그칠 줄을 몰랐다.









나는 아들을 학교에 등교 시키자마자 엄마의 수술이 있을 대학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동네에 대학 병원이 있어서 다행인가 싶다.


나는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병원 건너편에 있는 파리 바게트 카페로 갔다. 언니가 준 모바일 상품권에 남아 있는 마지막 금액으로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했다.

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주문한 샌드위치와 김이 오르는 커피가 나왔지만 나는 테이블 위에 놓고 멍하니 창 밖에 내리는 비를 쳐다 봤다. 입맛이 그닥 있지는 않았다. 겨우 샌드위치 하나를 먹었지만 나머지 하나는 도저히 넘어갈 거 같지 않았다. 남동생에게 카톡을 보내 놓고, 커피도 찔끔찔금 마시며 창밖의 내리는 비만 멍하니 쳐다 봤다.

자꾸 눈물이 났다.


'차가 막히네. 이제 다 도착해 가.'


남동생에게 답장이 왔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다가 한 개 남은 샌드위치와 반도 안 마신 듯한 커피를 카운터에 돌려 드리고 카페를 나왔다.


병원 건물 안으로 들어가 수술실이 몇 층인지 확인 하고 수술실 앞으로 찾아 갔다. 복도 벽 위쪽에 수술실이라 써 있는 글씨를 보는데 너무 낯설었다. 처음이었다. 수술실 글씨가 쓰여 있는 복도 병원 앞에 가 보는 게 말이다. 수술실 앞 자체도 처음 가 봤다.

그런데 수술 현황 모니터에 엄마 이름이 없었다. 나는 다시 1층으로 가 남동생에게 카톡을 보냈다.


'지금 도착 했어. 일단 내가 입원실에 가 볼게.'


나는 1층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남동생은 한 10분 있다가 전화가 왔다.


"어디야?"


"1층."


"1층 어디?"


"에스컬레이터 옆에."


그제야 나는 남동생을 발견했다. 남동생과 나는 조용히 근처 스타벅스 카페로 갔다. 엄마는 이제야 수술실로 들어 가셨다며, 차가 막히는 바람에 자신도 수술실 들어 가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단다.


요즘 내 사정을 잘 아는 남동생이 커피를 주문해 줬다. 나는 남동생과 커피를 마시며 친정 아빠를 기다렸다. 아빠는 엄마가 집에 수리할 있어 사람 올 거라고 미리 언급해 준 일 때문에 집에서 일 처리하고 오시느라 늦으실 수 밖에 없었다. 아빠도 오시고 우리 셋은 한 테이블에 둘러 앉았지만 솔직히 서로 말이 많지는 않았다.

우리 친정은 워낙들 건강해서 수술이란 것도 처음이고, 몸에 칼 대는 수술 자체가 처음이었다. 의사가 1기고 어려운 수술은 아니라고 했다지만 집 안에 이런 수술 자체가 처음인 남동생과 나와 아빠는 평소처럼 말이 많지 않았다.


한 시간 30분 정도 기다렸을 때 수술이 끝났다는 연락이 왔다해 우리 셋은 다시 병원 건물로 들어 갔다. 그런데 입원실 방문은 한 번에 한 사람 밖에 안된다고 한다. 방문증도 보호자 중 단 한 명만 발급 받을 수 있단다.

일단 아빠가 올라 가셨다. 나는 그냥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40분 정도 지나서 아빠가 내려오시고 이번엔 남동생이 올라갔다.


"아구 야, 그래도 수술이라고 칼 댄 곳이 아픈지 울고 있더라. 마음이 그렇더라."


아빠는 10분 정도 엄마를 달래 주셨고, 진정제를 링거로 다 맞은 후에야 엄마는 괜찮다고 했단다. 나는 또 눈물이 났다. 그냥 눈물이 났다. 나는 아빠 옆에서 조용히 울었다.

40분 정도 지나서 남동생이 내려 왔고, 나는 엄마를 배려하느라 엄마 얼굴을 보러 올라갈 수는 없었다. 수술한 의사는 수술이 종일 밀려 있어 당일 면담을 할 수 없다고 했단다. 그래서 의사 얼굴도 볼 수 없었다.

남동생과 아빠는 수술 중간이나 끝나고 따로 연락이 없었음 수술 잘 끝난 거니까 걱정하지 말자며 점심 밥을 먹으러 가자 했다. 우리 셋은 근처에 오래된 생선 구이 집으로 갔다.

밥 먹는 내내, 남동생과 아빠는 나보고 팍팍 먹으라며 나를 챙기기 바빴다.


"이것도 먹어. 팍팍 먹어. 그래야 힘내지."


"내 조카 지키고 그 새끼랑 싸우려면 많이 먹어. 많이 먹어."


남동생과 아빠도 마음이 그닥 편하지는 않을 텐데 둘 다 나를 챙기느라 바빴다.

나는 그런 둘을 위해 커피 값도, 밥값도, 병원 비도, 병원 주차비도 한 푼 보태지 못했다. 남동생과 아빠는 지금은 과정이라 힘들 수 밖에 없으니 신경 쓰지 말란다. 빨리 정리 다 끝내고, 나만 쳐다  보는 아들과 잘 생각만 하고 약해지지 말란다.


나는 다 정리하고 잘 돼서 내 아들과 내 걱정만 하는 친정 식구들에게 보답할 수 있을까?

제발 그렇게 될 수  있겠지?






 







아들이 학교에서 어버이 날을 위해 종이 카네이션을 만들고 카드를 썼는데 엄마인 나한테만 썼단다. 나는 고맙다고 안아 준 뒤 아들이 내민, 종이 카네이션이 붙여진 카드를 열어 봤다.


'요즘 우리 둘 다 힘들자나. 내가 쿠폰으로 안마도 해 주고 집 안 정리 정돈도 할게요. 힘든데도 나 매일 학교랑 학원에 보내줘서 고마워요. 주말에 친구들 만나게 해 줘서 고마워요.'라고 씌여 있었다.

나는 그 글을 읽고 또 눈물이 났다. 글 아래에 그려진 빨간 하트가 아들의  마무리였다.


나는 속으로, 고생없이 부족함 없이 키워준 엄마 아빠께 감사했다. 그리고 불편하고 힘든 남의 편을 견뎌 내느라 고생 중이면서도 엄마랑 함께라서, 엄마를 사랑한다고 말해 주는 아들이 고맙고 한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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