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면 그녀를 움츠러들게 만들던 몸에 대한 인식 혹은 몸 자체로부터 어느 정도는 자유로워질 줄 알았다. 지금의 경주 나이였던 30대의 친정 엄마와 동네 아주머니들을 떠올리면 엄마라는 존재는 말 그대로 제3의 성처럼 느껴졌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제3의 성, 아줌마. 새끼들 건사하는 게 최우선순위인 그녀들의 삶. 요즘처럼 배달 음식이나 밀키트도 흔치 않던 시절, 삼시 세끼를 비롯한 간식까지 대부분의 먹거리는 오롯이 엄마의 손 끝에서 완성되었다. 가족들 밥 먹이고 치우고 다시 밥상 차리고 설거지하고, 뒤집어 놓은 양말과 팬티들 수거해서 빨래하고, 마른 옷들은 서랍에 넣고, 집안 구석구석 쌓인 먼지들을 닦는... 일련의 모든 작업들은 숨 쉬듯 행해져야 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쓸고 닦는 짜고 말려야 하는 그녀들의 육체노동, 집안 대소사를 관리하고 집행하는데 들여야 하는 관심과 에너지를 포함한 모든 정신적 노동, 거기에 수시로 급작스럽게 해결해야 할 일들이 끊임없이 엄마들에게 부여된다. 엄마들에게 주어진 이 과업의 특징은 그녀들이 그렇게 열심히 그 일들을 한다고 해도 대단히 표가 나지는 않지만 하루만 건너뛰어도 집안 꼴은 엉망이 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그 수많은 일들은 그녀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래서 엄마들의 노동은 그림자와 같았다. 지금의 우리도 그렇고.
여자의 몸은 출산을 하고 자식을 키우며 기능적인 역할만을 주로 수행하는 몸으로 진화되는 것 같았다. 경주에게 엄마의 몸은 그런 류의 것이었다. 물론, 그때에도 예쁘고 날씬하고 잘 꾸미는 엄마들이 존재하긴 했지만 매우 드문 경우였기에 그런(예쁘고 날씬하고 잘 꾸미는) 엄마들이 등장할 때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경주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엄마들은 몇 달 동안 늘 뽀글거리는 파마머리에 햇볕에 그을린 피부, 집안일하기 편안 옷차림의 모습을 한 중년 여성들이었다.
1980년대 후반생인 경주가 세 아이의 엄마로 살고 있는 2024년은, 친정 엄마가 그녀를 키우던 30년 전과는 많이 부분이 급변하고 있다. 27살에 첫째를 출산한 경주는 35살에 초등학생의 엄마가 되었다. 첫째 아이 친구들의 엄마들보다 많게는 예닐곱 살이 어린 편이었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면 그때부터 엄마들도 자기 관리를 시작하며 다시 꾸미기 시작해 예뻐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경주는 그대로인 것처럼 느껴졌다. 오며 가며 만나는 학교 엄마들은 정말 예뻐지고 있었다. 딴 세계에 사는 여자들 같은 엄마들도 보았다. 외동아이 엄마나 다둥이 엄마나 다들 어쩜 그렇게 육아도 일도 자기 관리도 똑 부러지게 잘 해내는지... 하루 24시간이 아닌 36시간을 사는 슈퍼맘의 모습이었다. 특히, 아이들을 키우면서 신경 쓸 게 한 가득인데, 다이어트 식단에 규칙적인 운동, 거기에 피부 관리까지 하는 부지런한 엄마들을 볼 때면 경주는 왠지 모를 위축감이 들었다. 그녀도 충분히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데도 말이다.
10명 중 9명이 ‘인생에서 외모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나라, 경주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한국갤럽이 성인 남녀 1500명을 대상으로 벌인 '외모와 성형수술에 관한 인식(2020년 기준)'조사에서 89%에 해당하는 1335명이 인생에서 외모가 중요하다고 답했다. 외모지상주의 한복판인 한국에서 살고 있는 지금,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고 하여 이 사회적 미의 기준에서 제외 대상이 되진 않는다. 엄마들의 세계에서도 날씬한 몸과 매끈한 피부는 자본이자 권력이었다. 외모 자본도 권력도 없는 경주는 엄마들 세계에서 주목받지 못하고 소외된 외모 취약 계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 주 수요일, 첫째의 공개 수업과 총회가 있는 날이다.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대면으로 진행되는 행사다. 아이의 학교 생활도 직접 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기에 많은 부모들이 참여하는 듯했다. 엄마는 아이를 대변하는 외교관이라는 유명 입시 컨설턴트의 강연을 들은 직후라 그런지 총회와 공개 수업 참석에 대한 경주의 부담감은 커져갔다. 나라를 대변하는 외교관처럼, 내 아이를 대변하는 게 엄마의 모습이라는데… 자신감 있고 당당한 엄마의 모습을 보고 기뻐하는 첫째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첫째를 낳고 출산휴가만 쓰고 복직은 하지 못했다. 요즘이야 인식이 많이 변화하여 육아휴직이나 유연 근무제와 같은 임신, 출산, 육아와 관련된 복지 제도를 신청하는 여자들이 늘었지만 경주가 첫째를 출산한 10년 전만 하더라도 육아휴직을 신청하기란 쉽지 않았다. 더욱이 경주의 회사는 작은 건축사무소였기에 경주가 휴직을 하는 동안 근무를 해 줄 대체 인력을 구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래도 경주의 성실함과 근면함을 좋게 봐주신 이사님의 추천으로 출산 휴가는 사용하고 퇴사할 수 있었다. 첫 아이를 출산하고 하루 종일 아무 방해 없이 잠자는 게 소원이었던 그 아득한 시절의 어느 저녁, 휴대폰에 알람이 떴다. 출산휴가 급여가 지급된 것이다. '우와, 진짜 월급이 나왔네' 경주는 출산휴가 급여가 지급된 다음 날, 남편과 연애 시절 자주 가던 레스토랑에 가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빠네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오랜만에 방문한 경주와 남편을 알아본 레스토랑 사장님은 예쁜 아가와 함께 온 그녀의 테이블에 무알콜 칵테일을 서비스로 내어 주셨다. 경주는 그 칵테일과 함께 먹을 뉴욕 치즈 케이크까지 시켰다. 티라미수가 더 먹고 싶었지만 모유 수유 중이라 소량이어도 커피가 들어간 티라미수는 아기에게 안 좋을 것 같아서였다. 오늘따라 아가도 엄마, 아빠의 데이트를 응원하는 듯 저녁 먹는 내내 꿀잠을 자 주었다. '예쁜 우리 아가' 경주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행복감이 스며들었다. 집으로 갈 채비를 하는 그녀에게 남편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경주가 좋아하는 샛노란 프리지어 꽃이 그려진 엽서와 봉투였다. 경주의 남편은 최근 바뀐 부서에 적응하느라 매일 늦게 오는 바람에 경주와 아기에게 신경을 못 써준 것 같아 미안하고 투정 한번 안 부리는 경주에게 고맙다고 했다. 고생하는 거 잘 안다며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사라는 말과 함께. 엄마, 아빠의 사랑의 대화를 듣고 있는 건지 유모차 위의 아기는 눈을 감고 웃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아가와 다정하고 스위트한 남편, 경주는 이 시간이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자꾸 옛 추억을 회상하는 걸 보니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구나.' 경주는 희미하게 웃었다.
퇴사한 지 10년, 그 사이 임신과 출산을 하며 아이들과 함께 다닐 때 편안 옷 위주로만 입다 보니 제대로 된 옷 한 벌 없는 옷장을 괜스레 이리저리 살폈다. 당장 다음 주에 열리는 총회와 공개수업에 입고 갈 옷이 마땅치가 않았다. 경주에게 필요한 건 단정하면서도 날씬해 보이는 옷이었다.
후기도 좋고 마음에도 드는 원피스를 발견하여 장바구니에 일단 넣어두었다. 선뜻 구매하기 버튼이 안 눌러진다. 가격 때문이었다. 6만 8천 원. 아이들 옷은 철철이 잘 사두면서 정작 그녀 자신에게는 그러지 못했다. 옷을 자주 사지도 않지만, 셋째를 난 후에는 사더라도 이삼만 원 대에서 구매하던 경주에게 원피스 한 벌에 6만 8천은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총회 날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자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마음에 안 들거나 사이즈 때문에 반품이라도 하게 되면 입고 갈 옷이 진짜 없긴 한데...' 고심 끝에 극찬이 가득한 다크 그린 컬러의 원피스를 구매했다. 다행히 원피스는 후기대로 77 사이즈의 몸도 66처럼 보일만큼 훌륭했다. 첫째에게 날씬하고 예쁜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공개 수업 시작 5분 전, 설레고 떨리는 마음으로 아이의 교실로 들어섰다. 교실에 들어서니 벌써 엄마들끼리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색하게 눈인사를 하고 자리를 잡았다. 경주는 첫째 아들 재윤이의 학교 생활을 이렇게나마 보게 되어 좋았다. 수업 시간에 집중도 잘하고 선생님 질문에 발표도 잘하고 친구들과도 제법 친해진 모습이었다. 공개 수업이 거의 마무리될 때쯤 모여 있던 무리의 엄마들 중 한 명이 “어머 자기랑 같은 옷인가 봐.”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재윤이네 반 아이 엄마도 경주의 원피스와 똑같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멀리서도 눈에 들어오는 하얀 피부에 언뜻 봐도 잘록한 허리에 가녀린 팔의 소유자였다. 하필이면 이 교실에서 제일 날씬하고 예쁜 그녀와 같은 원피스라니. 이목이 집중되지 않을 만큼의 작은 소리였는데도 경주의 얼굴은 또 빨개지려고 시동을 걸었고, 덥지도 않은데 등과 겨드랑이에서 땀이 나는 것만 같았다. 잊고 있던 흰 스타킹의 악몽이 떠올랐다.
공개 수업이 종료되고 경주를 보고 달려와 환하게 웃는 아이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