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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Dec 06. 2023

인간혐오: 소심한 사춘기

내 사춘기는 끝나지 않았다

다들 사춘기 어떻게 보내셨는지?


나는 비교적 소심한 사춘기를 보냈다. 아마 부모님도 내 사춘기를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존재감 없는 둘째여서 그랬냐 하면 그건 아니고, 바로 위에서 언니가 스펙터클 난리 부르스를 친 탓이 컸다.


찢어지게 가난한 유년시절이 내게 상처로 남지 않은 데는 나름의 낭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의 낭만은 인켈 오디오였고, 엄마의 낭만은 양주 한 병이었다. 


아빤 비싼 인켈 오디오를 큰맘 먹고 구입했다. 그리고 매일 저녁 카세트테이프와 마이크를 꽂고 우리더러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무반주 라이브였지만 서로 먼저 부르겠다고 투닥거리다 보면 어느새 모두의 노래가 끝나 있었다. 아빠가 카세트테이프를 뒤로 감아 녹음된 소리를 재생하는 순간, 허름한 판잣집에서 폭소 대잔치가 열렸다.


서울 반지하로 이사 온 후 살림이 점점 펴면서 우린 한 연립주택 4층으로 이사했다. 한결 여유로워진 엄마는 양주를 즐겼다. 썸씽 스페샬이라는 싸구려 위스키를 홀짝이며 아빠와 고스톱을 치는 것, 그것이 엄마의 낭만이었다. 엄마 아빠의 고스톱판은 주로 아빠의 일이 많지 않은 겨울에 펼쳐졌다. 엄마가 안주로 마른오징어를 구우면, 우린 그 추운 날에 아이스크림을 할짝이며 안방에 옹기종기 모여 TV도 보고 고스톱 구경도 했다.


그렇게 평온한 일상이 하루아침에 와장창 깨졌다. 고등학생이 된 언니가 가출을 한 것이다. 어렵게 장만했던 내 집을 포기하고 판잣집으로 이사 갈 때도, 부탄가스 폭발 사고를 당했을 때도 씩씩했던 엄마는 몸져누웠다. 하지만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절친을 불렀고, 두 사람은 도장 깨기 하듯 언니 친구들을 한 명씩 찾아가 족치기 시작했다. 마침내 언니의 소재를 파악한 엄만 언니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집으로 끌고 왔다. 퇴근하고 집에 온 아빠는 분기탱천하여 언니를 닥치는 대로 때렸다. 손에 집힌 게 파리채였다면 파리채로 때렸을 테지만, 마침 청소기 대가 옆에 있었다.


지금이야 "아이랑 이야기를 나누셔야 해요, 틀림없이 뭔가 어려움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거든요"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지만 그땐 그렇지 않았다. 학교든 가정이든 애가 잘못하면 일단 매부터 들고 볼 때였다. 온몸에 피멍이 든 언니는 두 번째로 집을 나갔고, 그 후로도 언니는 가출과 잡혀오기를 몇 번 더 반복했다.


언니가 집을 나갈 때마다 엄만 마치 처음인 것처럼 늘 쓰러졌다. 아빤 몇 장이나 되는 장문의 편지를 써서 언니의 마음을 돌리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싫어무새가 된 언니는 엄마 싫다, 엄마 목소리도 듣기 싫다, 아빠도 싫다, 집도 싫다는 소리만 반복했다.


나는 언니와 같은 방을 쓰는 동안 징그럽게 싸웠다. 방 한가운데에 초록색 테이프를 쭉 붙여 선을 만들고, 넘어오면 죽인다고 서로 주먹질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러다 방을 혼자 쓰게 되었는데도 기쁘기는커녕 화만 났다. 언니가 처음 가출했다 돌아왔을 때는 반갑고 기뻤지만, 언니의 가출이 반복되자 짜증만 났다.


나도 사춘기였다. 하지만 엄마 아빠의 모든 관심은 언니에게 쏠려있었다. 


'그렇지, 나 따위에 관심을 가져줄 리가 없지.'


언니 하는 꼴이 한심하고 짜증이 나기 시작하자 엄마 아빠도 싫었다. 그냥 세상 모든 사람이 다 한심하고 멍청해 보였다. 친구가 하는 말도 다 바보같이 들렸다. 내 사춘기는 그렇게 인간 혐오와 함께 왔다. 하지만 언니의 가출 때문에 몇 번이나 쓰러진 엄마와 생전 처음으로 언니 앞에서 눈물을 쏟은 아빠를 보면서 '나는 보태지 말아야지, 그냥 닥치고 있어야지, 국으로 가만히 있자'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다 유난히 심사가 뒤틀린 어느 날, 나는 동네 페인트 집에 가서 검은색 락카를 구입했다. 그리고 엄마 아빠가 집에 없을 때 방문을 통째로 시커멓게 칠했다. 새까매진 나무 문은 꽤 쿨해 보였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 시커먼 문 앞에 <통행금지> 팻말을 붙였다.


시간차를 두고 집에 돌아온 엄마 아빠는 문 꼬락서니를 보고 헛웃음을 쳤다. 화를 내거나 혼낼 의욕도 생기지 않을 만큼 어처구니가 없다고 했다. 


'흥. 나야 좋지.'


나는 까매진 그 문을 참 좋아했다.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았고, 그 문만 열고 들어가면 나만의 세상이 펼쳐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나는 내 방을 만끽했다.


하지만 호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엄마가 집 앞 농협에서 아빠가 쓸 돈 600만 원을 찾아 돌아온 날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돈을 잘 놓으려는데 아랫집 아줌마가 잠깐 내려오라고 전화했다. 제주도 사람인 엄마에게 문은 그냥 열고 닫는 것일 뿐, 잠그는 물건이 아니었다. 돈 든 가방을 옷걸이 아래 내려놓고 잠깐 내려갔다 올라온 사이에 600만 원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스포: 언니가 훔쳐간 거 아님).


엄마는 즉각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농협 CCTV를 확인했다. 모자를 쓴 한 남자가 은행 안에서 어슬렁거리다 엄마를 따라 나가는 모습이 찍혔는데, 당시 CCTV는 화질구지였고 은행 내부에만 설치되어 있어서 그 이상의 동선은 알아낼 수 없었다. 다만 아래층 아줌마가 엄마를 부르지 않았다면 인명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는 형사의 말과 함께 사건은 종료되었다.


그날, 엄마의 진술을 들으러 찾아온 형사가 내 방 문을 보며 아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말했다.


"저 방은 뭡니까?"


"아, 우리 딸내미 방이유."

(왠지는 모르겠지만 엄만 어색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버릇이 있다)


"집에 왜 저런 방이 있죠? 딸이 창고에 살아요?"


"아니요. 지가 직접 칠했슈."


"왜죠?"


"몰러유......"


"안에 좀 볼 수 있을까요?"


"아, 예."


내부를 꼼꼼히 확인한 형사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다 돌아갔다. 언니가 가출할 때마다 쓰러졌던 엄마는 600만 원을 잃어버렸을 때도 몸져 누웠다. 아빠는 사람 안 죽은 게 어디냐고, 툴툴 털고 끝내자고 했지만 속상한 마음을 감추지는 못했다. 그리고 화풀이 타겟은 내 문이었다. 오래 참아주었던 아빤 그날 바로 갈색 페인트를 사다가 문을 다시 칠해버렸다. 물론 통행금지 팻말도 인정사정없이 뜯어냈다. 


그렇게 나의 사춘기는 공권력 투입과 함께 뜨뜻미지근하게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미처 다 쏟아내지 못한 내 사춘기는 지금도 때때로 불쑥불쑥 올라와 날 꼴통으로 만들곤 한다. 내 사춘기는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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