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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Dec 02. 2023

둘째라고 호락호락 당할쏘냐

어림없지

나는 종일 동동거리며 집안일하는 엄마가 늘 가여웠다. 그래서 싱크대 앞에 발받침을 놓고 올라가 설거지를 하고, 엄마가 방바닥 걸레질을 하면 옆에서 상이라도 닦았다. 언니와 쌍둥이 동생은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 갔지만, 나는 그 시간에 엄마 곁에 나란히 앉아 손빨래를 했다.


아무리 철이 일찍 들었대도 애는 애였다. 형제들은 학원에 갈 시간에 나만 집에 남아 엄마 일을 돕는 게 어느 순간부터 당연한 일이 되기 시작하자 슬그머니 독기가 차올랐다.


"엄마, 언니랑 애들은 학원 가는 데 왜 나만 안 가?"


엄마가 말했다.


"넌 똑똑하니까. 넌 학원 안 가도 잘하잖아."


어릴 때 혼자 한글과 구구단을 뗀 후, 부모님은 날 영재 아니면 천재 정도로 생각했다. 물론 당신들 딸이 그 정도는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렇게라도 합리화를 하면서 조금이나마 교육비를 아끼고 싶었으리라. 나도 학원에 가고 싶었지만 엄마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기에 일단은 꾹 참아보았다. 하지만 마냥 착한 아이는 아니었으므로 불쑥불쑥 화가 치밀었다.


"나도 학원 보내줘."


"학원 가도 별로 배우는 건 없어. 넌 다 아는 내용이야."


엄마가 그렇게 말할수록 더 심사가 뒤틀렸다. 엄마 아빠 관심 끌려고 필사적으로 똑똑하게 굴었을 뿐인데, 왜 나만 혼자 집구석에 처박혀 궂은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 엄마가 늘 입에 달고 사는 '솔선수범'이 '혼자 독박을 쓰라'는 뜻이라면 솔선수범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난 그날부터 징그럽게 떼를 쓰기 시작했다.


"나도 학원 보내줘. 안 그러면 산수 빵점 받을 거야."


"나도 학원 보내줘. 안 그러면 설거지 안 할 거야."


난 떼와 협박을 동원해 엄마를 압박했고, 결국 엄마는 한숨을 내쉬며 내 손을 잡고 한 종합학원을 찾았다. 애매한 둘째였던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착한 아이 행세를 했지만, 한번 배알이 꼴리면 아무도 말릴 수 없는 꼴통이 되곤 했다.


실내화 사건도 그랬다. 언니와 나는 매주 토요일마다 번갈아가며 4남매의 실내화를 빨았다. 이번주가 내 담당이면 다음 주는 언니 차례였다. 물론 우리 둘 다 실내화 빨기를 아주 싫어했다. 이제 겨우 열 살 안팎의 어린아이들이 신나게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어느 토요일, 그날은 언니 차례였는데 언니가 불쌍한 척하며 말했다.


"나 오늘은 실내화 진짜 진짜 빨기 싫어. 우리 한 번만 바꾸자. 다음 주에 내가 빨 테니까 이번주엔 네가 빨아."


그때 난 이미 '나만 혼자 집안일을 다 한다'는 피해의식에 젖어 있었다.


"지난주에 내가 빨았는데 이번주에 또 내가 빨면 나만 두 번 빠는 거잖아. 그러면 언니도 다음 주에 빨고 그다음 주에도 빨아. 그래야 공평하지. 그리고 그다음 주엔 원래 언니 차례니까 또 언니가 빨아."


"?"


언닌 어리둥절해했다.


"어떻게 그렇게 돼?"


"잘 생각해 봐. '나, 언니, 나, 언니, 나, 언니'였는데 '나, 나, 언니, 나, 언니, 나' 이렇게 되면 내가 억울하잖아. 그러니까 '나, 나, 언니, 언니, 언니, 나, 언니, 나, 언니' 이게 맞지."


"??"


"맞다니까."


"아닌 것 같은데? 왜 내가 빨아?"


"암튼 그렇게 돼. 원래 그런 거야. 그러니까 내가 이번주에 바꿔주면 언니가 3주 연속 빨아야 돼. 그래도 좋으면 바꿔."


"뭐야, 뭔가 이상해. 그런 게 어디 있어!"


"싫으면 말고."


언니는 숨겨두었던 초콜릿까지 동원해 날 구슬렸지만 난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언닌 결국 씩씩거리며 실내화를 빨다가 통곡했다.


형편없지만 많은 추억을 안겨주었던 판잣집 생활은 2년 만에 끝났다. 내가 3학년 2학기 되던 해에 우린 다시 서울의 한 다가구 주택으로 이사했다. 밖에서 보면 1층이었는데 구조가 희한한 집이었다. 샷시문을 열자마자 부엌이었고, 부엌에서 반 계단 내려가면 안방이 나왔다. 그 방을 거쳐 안쪽으로 들어가면 화장실과 작은 방 2개가 나오는 미로 같은 반지하였다.


쌍둥이들은 벌써 국민학교 1학년이 되었고 두 놈의 말썽도 극에 달했다. 집에서 인형놀이하는 것보다 몸으로 노는 걸 더 좋아했던 내게 쌍둥이들은 좋은 놀이 상대였다.


하루는 막내와 골목에서 뛰어노는데, 막내가 날 놀리고 집으로 도망갔다. 난 막내를 쫓아갔지만 막내는 재빨리 샷시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옆쪽으로 난 작은 창문을 열고 혀를 날름거리며 약을 올렸다.


호락호락 져 줄 성격이 아니었던 나는 주먹으로 샷시문을 쾅쾅 두드리기 시작했다.


"문 열어라, 뒤진다!"


"열 수 있으면 열어보시든가~ 멜롱~ 메롱메롱~"


"이게!!"


내 주먹질은 더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와장창!"


그야말로 엉망진창 와장창이었다. 그 두꺼운 샷시 유리가 깨지고 말았다. 내 손날에서도 피가 철철 났다. 때마침 시장에 갔다 온 엄마가 그 꼴을 보고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댔다.


"이 썅놈의 새끼들, 진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지! 으이그 징그러~!"


엄만 내 손에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준 다음, 막내와 나를 집 밖으로 내쫓았다. 우린 앞집 담장 아래 나란히 팔을 들고 서 있다가 땅거미가 질 때 즈음, 밥 먹으러 들어오라는 엄마의 앙칼진 목소리를 듣고 헤헤거리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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