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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두칠 Dec 13. 2023

저녁 없는 삶

단점 여덟 : 초근

선호 : 누나는 요즘 일 어때? 괜찮아? 좀 한가할 땐가?
아영 : 원래대로라면 지금이 좀 덜 바쁜 때이긴 한데, 얼마전에 이슈가 하나 터져서...
선호 : 아오, 또 저녁 없는 삶을 살고 있겠구만.
아영 : 응. 워낙 위에서 급하게들 찾으시니까.
선호 : ‘저녁이 있는 삶’이란 말을 만든 게 공무원인데, 공무원은 저녁이 없네.
기로 : 공무원이 ‘저녁 있는 삶’이란 말을 만들었다고요? 원래 있던 표현이 아니라?
선호 : 아니 뭐 쓰던 말을 따왔을 순 있지.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어딨겠어. 근데 최소한 이렇게 알린 건 공무원이 맞다고 봐야지.
아영 : 아마 선거 슬로건이었을걸?
선호 : 어어, 맞아. 경선 때 손학규 캠프에서 이걸 캐치프라이즈로 내걸었지. 공무원인 보좌진들이 만든 거였을 거고 결국.

저녁이 있는 삶 : 2012년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손학규 후보가 발표했던 모토. 정책 담당 보좌관, 메시지 담당 비서관 등이 함께 만든 말이라는 설이 있음.

기로 : 좀 슬픈데요? ‘저녁이 있는 삶’이란 말을 만든 사람들의 삶에는 저녁이 없다니.
선호 : 약간 그런 거지. 최고급 초호화 아파트를 짓는 인부들은 막상 그런 집에서 살 수가 없는.
기로 : 으으. 그게 내 미래라니.



기로 : 저녁이 없다는 게 결국 야근을 한다는 거죠?
선호 : 그렇지 대부분.
기로 : 그럼 결국 일이 많다는 거죠?
선호 : 음, 그렇지 기본적으로. 계속 말했었잖아, 공무원이 일이 많다고.
기로 : 말하긴 했었죠 형이. 근데 진짜 들어도 들어도 잘 안 와닿으니까.
선호 : 하긴 나도 그랬다. 공무원은 일 별로 안 하는 줄 알았지. 출근하고 한 달도 안 돼서 그게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았지만.
기로 : 다시 얘기 좀 해줘요. 무슨 일이 그렇게 많은지.
선호 : 그냥 디폴트로 많아 업무가. 사실 자리마다 다르기도 하고 부처마다 다를 수는 있는데 기본적으로 중앙부처 사무관이면 열에 여덟은 초근을 해야지만 본인 일을 할걸?
기로 : 업무 많은 게 디폴트다?
선호 : 어. 내가 회사 처음 들어와서 진짜 놀란 것 중에 하나가 규모였거든? 생각보다 과가 너무 작은 거야.
기로 : 과가 보통 몇 명인데요?
선호 : 열 명 전후?
기로 : 적긴 적네요. 그게 제일 작은 단위인거죠?
선호 : 팀도 있고 계, 줄, 티에프 같은 것도 있긴 한데 기본적으로는 그렇지. 조직도에 나오는 제일 작은 단위?
기로 : 근데 그 과가 맡은 일은 많다는 거군요.
선호 : 인력 대비 업무가 많다는 거지. 그렇게 작은 과에서 대한민국을 컨트롤하니까.
기로 : 무슨 대한민국을 컨트롤씩이나.
선호 :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근데 아예 틀린 말은 아니야. 어떻게 보면 맞아 진짜. 과장 빼면 열 명도 안 되는 과에서 대한민국 입시제도를 총괄하고, 전국 모든 유통 대리점 부정행위를 다 감시하고, 온갖 전통주를 다 관리하고.

교육부 인재선발제도과 / 공정거래위원회 유통대리점조사과 / 농림수산식품부 식품외식산업과

기로 : 오, 전통주는 좀 좋은 거 같은데요.
선호 : 어쨌든 그러니까 일이 많다고.
기로 : 네네.


아영 : 일을 하기 전에는 공무원이 무슨 일을 하는지 느끼기가 좀 어려운 거 같아.
기로 : 갑자기 왜요 누나.
아영 : 나도 공무원 되고 나서야 느꼈거든. 내가 느낀 게 한 마디로 딱 이거야.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보도블럭도 그냥 깔린 게 아니구나 하는.
기로 : 그렇겠죠. 누군가가 깔았겠죠.
아영 : 그걸 잘 못 느꼈었어. 그냥 당연히 깔려있는 느낌이었어. 누가 막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이라기 보다, 그냥 얘는 원래부터 여기 바닥에 이렇게 깔려있었다는 느낌?
기로 : 가끔 공사하잖아요 보도블럭. 다시 깐다고.
아영 : 응, 그니까 그런 걸 봐도 그냥 당연히 다시 깔리는 거 같았다니까? 뭘 안 해도 때가 되면 눈이 오는 것처럼?
기로 : 아하,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되는 거 같았다고요.
아영 : 오, 그 표현이 딱 맞다. 맞아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되는 거 같았어. 저절로 눈이 오고, 저절로 매일 해가 뜨고 하는 것처럼 보도블럭은 여기 저절로 깔려있고, 저절로 교체되고 하는 느낌.
기로 : 근데 그게 새롭게 느껴진 거네요 누나는.
아영 : 맞아, 갑자기.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인도가, 사실 원래 인도가 아니라 누군가가 계획을 한 거야, 여기에 이만한 폭으로 이만큼 길게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사람이 다니는 길로 하겠다고. 지자체 공무원이 했겠지.
기로 : 아, 그러네요. 원래는 그냥 공터였겠죠.
아영 : 응응. 폭을 얼마로 할지, 타일은 어떤 모양으로 할지, 재질은 뭘로 할지, 공사는 언제 할지, 총 얼마 규모로 할지, 어느 회사랑 계약을 맺을지. 이런 걸 전부 다 계획을 했던 거였다니까 공무원이?
선호 : 그리고 그걸 보고했겠지 위에다가.
아영 : 그치! 과장님한테 보고하고, 설명하고, 페이퍼도 쓰고, 기안문도 쓰고, 결재도 받고, 예산처리도 하고. 어쩌면 보도자료도 냈을 거고, 국민신문고 들어오면 민원처리도 했을 거야.

<보도블럭 교체공사 업체선정 입찰공고> ('22.5.16. 나라장터 공고, 경기도 부천시)

선호 : 연말에 왜 멀쩡한 보도블럭 뒤집냐고 민원 들어왔겠네 분명히.

<"연말만 되면 왜 멀쩡한 보도블록을 파헤치는 겁니까"> ('23.12.6. 영남일보)

아영 : 맞아, 그랬을 수 있다니까 진짜.
기로 : 생각보다는 해야 되는 일이 많군요.
아영 : 응. 이게 다 여러 사람이 갈리고 갈린 흔적이었어. 일하기 전에는 전혀 못 느꼈는데.
선호 : 보도블럭 하나 까는 것도 그런데 다른 것들은 어떻겠어 그러니까. 하다못해 지역 축제들도 그럴 거 같아 난. 우리 눈에는 그냥 중구난방 여기저기 의미도 없는 예산 낭비로 보이지만 사실 그거 담당하는 공무원들 입장에선 죽어나는거지.


아영 : 그래도 업무시즌이 있는 경우들도 많아.
기로 : 덜 바쁘고 더 바쁘고 한 시기가 정해져 있다는 거죠?
아영 : 응. 예를 들면 국회가 관심을 갖는 정책 담당은 10월 정도가 제일 바쁘고, 예산 회계를 맡고 있거나 관련 사업을 하고 있으면 11월 전후가 시즌이지. 결산을 해야 하거나 하면 연말이 바쁠 거고.
선호 : 기획 쪽에 있으면 연말 연초가 또 엄청 바쁘잖아. 연두 업무보고 이런 거 준비해야 되니까.
기로 : 기획이 뭐하는 곳이에요? 연두 업무보고는 뭐고?
아영 : 연두 업무보고라는 게 매년 연초에 우리가 작년에 이런 걸 이만큼 했고 올해는 이제 이런 걸 할 겁니다 하고 보고를 하는 거거든? 기관장, 그러니까 장관 같은 사람들한테도 하고 대통령한테 하기도 해. 이런 걸 챙기는 데가 기획이고. 약간 행정을 위한 행정이라고 해야 되나?

<尹, 업무보고 마무리... 개혁, 수출, 과학기술 방점> ('23.2.7. 이뉴스투데이)

선호 : 연두 업무보고 뿐이 아니라, 정부 바뀔 때마다 예를 들어서 <문재인 정부 백서> 같은 걸 내기도 하고, 분기마다 성과보고서 만들고, 매주 주간업무계획, 매월 월간업무계획, 어우 뭐 하는 거 진짜 많아.

<'문재인 정부' 5년 국정성과 담은 온라인백서...靑 홈페이지 공개> ('22.3.20. 머니투데이)

기로 : 연말 연초가 아니라 평소에도 계속 바쁜 거 같은데요 여긴.
선호 : 그렇긴 한데 유독 연말 연초가 더 바뻐.
기로 : 초근을 할 수 밖에 없구나.
선호 : 그렇다니까. 그래도 정책 일선 담당자다 하면 내 손이 빠르면 좀 낫거든? 근데 기획은 아니지. 기획에 있는 사람이 다 쓸 수가 없으니까 담당 공무원들이 써줘야 하거든. 그렇게 각자 써준 걸 취합해서 그걸 바탕으로 새로 페이퍼를 또 써야되니까 시간이 더 걸리지. 내가 아무리 손이 빨라도 담당자들이 자료를 넘겨줘야 시작이라도 할 텐데 그게 안 되는 거지.
기로 : 자리마다 초근이 다르다는 게 이런 말이었군요.
선호 : 맞아. 초근이 많고 적고 한 시즌도 다르고, 무조건 초근을 해야만하는 자리도 있고.



선호 : 근데 사실 일이 많은 게 문제는 아니야.
기로 : 문제 맞지 않아요...?
선호 : 아, 문제는 문제네. 근데 그거보다 더 짜증나는 게 있어. 진짜 삶의 질을 확 낮춰버리는.
기로 : 뭔데요 그게?
선호 : 내가 당장 오늘 저녁에 초근을 할지 말지를 모른다는 거.
기로 : 응? 그걸 왜 몰라요? 오늘까지 해야되는 일이 남으면 하는 거고, 아니면 안 해도 되는 거 아닌가? 아, 내가 퇴근 때까지 일이 얼마나 남을지를 몰라서 그래요?
선호 : 뭐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갑자기 민원인이 찾아와서 일할 시간이 없어지고 했을 수도 있고. 근데 핵심은 그게 아니지.
기로 : 그럼요?
선호 : 위에서 시켜 갑자기.
기로 : 시키면 해야죠 공무원이.
선호 : 이 자식은 벌써 공무원 다 됐네.
기로 : 그렇잖아요. 상명하복 아니에요 공무원이?
선호 : 맞어. 맞는데, 꼭 안 해도 될 일을 시키니까 짜증이 나는 거지. 그거 때매 난 저녁 약속도 못 잡고 집에도 못 들어가고.
아영 : 맞아. 그런 건 좀 있어. 윗 사람들 욕심 때문에 밑에 있는 사람들이 고생하는.
선호 : 그래, 그런 거. 공무원인데 국민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그런 몇 몇 사람들을 위해서 일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니까.
기로 : 확 와닿지가 않는데 예를 들면요?
선호 : 예를 들면... 아, 이걸 예를 들 수가 없다. 에피소드는 진짜 많은데, 이걸 말해주기엔 너무 딥해. 너무 속얘기를 해야 돼서 할 수가 없다.

국가공무원법 제60조(비밀 엄수의 의무) 공무원은 재직 중은 물론 퇴직 후에도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엄수하여야 한다.

기로 : 음, 그러면 저는 그냥 겉핥기로만 알고 말게요.
선호 : 아씨, 어쩔 수가 없다 지금은. 하여튼 안 해도 되는 일들인데 몇 몇 사람들 사리사욕 때문에 쓸 데 없이 삽질한다는 것만 좀 알아줘라. 당장 오늘 저녁 스케줄도 모르고.


아영 : 아, 그래도 국회 대기 얘기는 할 수 있겠다.
선호 : 맞네.
기로 : 국회 대기가 뭐에요? 국회에서 기다리나? 아니면 국회가 기다리나요?
아영 : 국정감사, 인사청문회, 예결산, 기타 등등 국회가 정부한테 이것 저것 물어볼 때가 있잖아?

국정감사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제2조(국정감사) ① 국회는 국정전반에 관하여 소관 상임위원회별로 매년 정기회 집회일 이전에 국정감사 시작일부터 30일 이내의 기간을 정하여 감사를 실시한다...

기로 : 있죠. 뉴스에 많이 나오잖아요.

<'가짜뉴스·R&D예산'...올해 국감 스타는> ('23.10.28. 머니투데이)

아영 : 그걸 공무원이 준비하거든.
기로 : 현장에서 국회의원이 장관한테 질문하는데 공무원이 어떻게 준비를 해요?
아영 : 그게 아예 아무것도 없이 즉석으로 하는 게 아니야.
선호 : 표현이 맞는진 모르겠는데, 대본이 있어.
기로 : 네? 대본이요? 짜고 친다고요?
아영 : 에이, 대본이라는 말은 좀 그렇다.
선호 : 그런가? 하여튼 사전질의가 있어. 예를 들어 국정감사다 하면, 국정감사일 하루 전에 의원실에서 얘기를 해줘. 우리는 이런 이런 질문들을 할 거라고. 그러면 그 질문을 공무원이 받아다가 답변을 쫙 만들어서 보고하는 거야 장관한테.
아영 : 국회에서 질문 받아오는 것도 공무원이 하는 거고. 국회팀이.
기로 : 와, 전혀 몰랐어요. 대박이네.
선호 : 그렇잖아. 어떻게 장관이 그 모든 걸 세세하게 하나 하나 다 알겠어. 장관직을 하고 있는 개인이 대답하는 게 아니라 기관장으로서 대답하는 거니까 기관이 동원되는 게 맞긴 맞지.
기로 : 근데 장관한테 보고하려면 그 이전 단계들도 있을 거 아니에요.
선호 : 그렇지. 보통 사무관이 답변 초안을 쓰고 과장, 국장, 실장, 차관, 보좌관 전부 보고를 쫙 하지. 보고하면서 빠꾸먹으면 계속 고쳐가고.
기로 : 아니, 바로 전날 준다면서요 질문을.
선호 : 당일날 주기도 해.
기로 : 네? 당일요?
선호 : 밤 12시 이후로. 당일이지.
기로 : 와, 그러면 답변을 언제 쓰고 보고를 언제하고 언제 고치고 언제 다 하는 거에요.
선호 : 그러니까 저녁이 없지.
아영 : 국회대기라는 게 그래서 있어. 국회에서 질문을 줄 때까지 대기하는 거야.
기로 : 아니, 좀 미리 주면 안 되나?
아영 : 국회도 똑같지. 우리가 장관님한테 답변을 보고하듯이, 의원실에서는 보좌관들이 의원한테 예상질문을 보고하겠지. 오케이 된 게 우리한테 올 거고.
기로 : 그래도 자정은 좀 심했는데요.
선호 : 야, 진짜 심한 건, 내 질문이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른다는 거야.
기로 : 그러네요 생각해보니까. 내 담당업무에서 질문이 있을지 없을지를 모르네요.
아영 : 그래도 질문 안 나오는 게 낫지 않아? 내 업무에서 질문 폭탄 맞으면, 으으, 진짜 너무 힘든데.
선호 : 다 싫어 그냥 다.



기로 : 형 누나 얘기 들어보니까, 공무원 되면 저녁은 그냥 포기해야겠네요.
선호 : 저녁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공무원을 포기하라니까 지금이라도. 난 벌써 6년 찬데 아직도 사표쓰는 동기들 계속 생긴다. 너도 세월 낭비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접으라니까 공무원 시험.
아영 : 공무원, 특히 중앙부처 사무관이 심한 거 같긴 한데, 저녁 일정이 엄청 불투명한 건 맞거든? 일이 많아서 애초에 저녁 있는 삶이 어려운 것도 맞고? 근데 모르고 공무원 된 거면 모를까, 기로 너는 알고도 공무원이 되는 거니까 훨씬 나을 거야.
선호 : 그건 그렇네. 그래, 니 말대로 차라리 그냥 저녁은 아예 없다 생각해라. 그러면 속 편하긴 하더라.
아영 : 맞아. 어차피 오늘도 밤 늦게 퇴근하겠지 생각하면서 출근하면, 가끔 정시퇴근할 때 기분이 그렇게 좋아. 괜히 없던 시간이 생겨난 거 같고 막.
기로 : 이게 공노비의 마인드인가요.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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