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섭은 보퉁이 하나를 손에 들고 정자리로 가고 있다. 월암 남단에 있는, 동쪽 입구와 서쪽 입구를 잇고 있는 길을 따라가는 길이다. 곧 정미소가 보이기 시작한다. 월암, 석천, 봉화, 정자 등 근방에 사는 농부들이라면 너나없이 이 곳에서 방아를 찧고 옆에 있는 오막살이 주막에서 술을 마셨다.
옆으로는 난 오솔길은 방씨 집 과수원으로 가는 길이다. 황토 흙을 밟으며 산비탈을 오르면 사과나 복숭아, 매실 등의 과일나무와 그것들을 한 눈에 지켜볼 수 있는 곳에 방씨의 집이 있다.
주막은 ‘제모리’ 라고 불리는 곳으로 주모는 큰 키에 약간 쉰 목소리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잠시 쉬었다 가라고 말하곤 하는 오십을 넘긴 여자다. 그녀는 나이가 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피부는 하얗고 깨끗하며 말투와 행동에는 잘 익은 배 같은 사근사근함이 배어 있다. 그녀는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혼자 살고 있는 그렇고 그런 주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왼쪽 눈썹에 검은 점이 박힌 작달막하고 촌사람답지 않게 귀에 보청기를 끼고 다니는 돼지거간 영감의 첩이다. 주막도 영감이 차려준 것이다. 영감의 본마누라는 마을 동쪽 빨간 함석집에 살며 이따금씩 히스테릭한 목소리로 손자들을 닦달하거나 두들겨 패기도 하는 성깔 있는 노파였다.
오막살이 주막의 주모, 제모리댁이 가장 바쁜 날은 정미소가 우당탕탕, 소리를 내지르며 벼를 찧어댈 때다. 사람들은 대개 소가 끄는 수레에 벼를 싣고 정미소에 나타나는데 이것들은 곧 정미소 시멘트 바닥에 부어졌다. 그 때부터 농부들이 할 일이란 없었다. 그들은 몇 차례나 정미소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며 벼가 허물을 벗는 동안 주막으로 가서 정미소 주인이 전갈을 보내기를 기다리며 주모가 따라주는 술을 마셨다.
일이 모두 끝났을 때에도 사람들은 정미소 주인과 함께 주막으로 갔다. 그들은 몇 말 몇 되를 삯으로 할 지 흥정하며 간혹 주모의 의견을 묻기도 했다.
동섭도 이 곳에 와서 방아를 찧는 동안 주모의 엿가락이 휘어지는 듯한 사근사근한 말이나 농부들이 짓궂게 내뱉는 반말의 농지거리를 들으며 몇 번이나 웃은 적이 있었다. 그녀를 볼 때마다 느낀 감정은 부드럽고 따뜻하다는 것이다. 누구와 다투는 일도 없는 듯하고 농사꾼 아낙들처럼 거세거나 악착스런 면도 엿볼 수 없는 그녀는 동섭에게 신비한 존재였다.
집 앞을 지나는 동안 그녀와 마주치지는 못하더라도 목소리만이라도 듣기를 동섭은 원한다. 하지만 집을 지나쳐 오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가 본 것은, 판자를 대어 만든 부엌문과 길에서 겨우 올라온, 비료포대로 덮인 들창에서 들리는 몇 사람의 남자 목소리뿐이다. 서운하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거나 뒤돌아보지는 않는다. 나는 아내가 있는 남자다, 그는 중얼거렸다.
길 왼편에는 모퉁이를 돌 때까지 낙엽송이 길게 서 있고, 오른편에서 흐르던 개울은 모퉁이를 돌면서 왼편으로 바뀌어 흐른다. 그 곳을 돌면 멀리 햇빛을 받을 때마다 잎이 반짝거리는 은사시나무 사이로 정자 마을의 노인정이 보인다. 조금 더 걸어가면 다른 마을과 다름없이 마을의 입구에 서서 수문장 역할을 하는 느티나무가 나타난다. 그는 이보다 더 크고 오래된 나무는 본 적이 없다. 구영리에 서 있는 느티나무도 이것보다는 더 오래 서 있지 않았다. 그 나무 밑동 안에는 곰이라도 한 마리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 있다.
동섭이 막 느티나무를 감고 돌려고 할 때다. 썩어서 검게 변한 나무 밑동 속에서 두 아이가 나오려다가 그가 오는 것을 보고 부리나케 다시 들어간다. 아이들은 그가 지나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왜 이런 수상쩍은 행동을 하는 지 그는 알고 있었다. 이 나무는 금줄을 두르지 않았다 뿐이지 동네 사람들에 의해 오랫동안 신성시되어 왔다. 아이들이 느티나무에 올라가거나 밑동 안에 들어가 노는 것은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금지는 어떤 것인가. 한 사회를 묶고 유지해 나가는 방편이었다.
정자마을은 약간의 경사가 있는 야산 위에 가로로 한 줄, 그 위로 또 한 줄 하는 식으로 세 줄로 늘어선 동네로 다른 마을에 비하면 꽤 부유한 마을이다. 마을 앞 너른 들이 대부분 그들의 소유이고 다른 마을에는 아직도 몇 채씩 남아있는 초가집이 이 마을에는 없다.
박성기의 집은, 멀리서 보면 마을의 서쪽 언덕에 마치 성이나 되는 것처럼 집 주위를 빙 둘러가며 높은 담으로 막고, 오만한 태도로 다른 집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 보인다. 너른 마당을 걸어 들어가면 낡은 기와에 색이 바랜 목재기둥과 긴 마루가 보였다.
동섭은 고샅을 지나 기와집으로 올라가기 위해 수십 개의 계단을 밟아 올라간다. 동섭은 때마침 밖으로 나오려던 여동생(숙자)과 마주친다. 숙자는 핏기 없이 창백한 모습이어서 한눈에도 환자처럼 보인다. 숙자의 얼굴에 잠시 반가운 빛이 떠오르다가 이내 사라진다. 동섭도 얼핏 미소만 지으며 그것을 놓치지 않고 본다. 오랫동안 소원하게 지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 맘놓고 웃지 못한다.
언젠가 동섭은 여동생이 면 보건소에서 타왔다는 약을 먹지 않고 무더기로 대밭에 버린 것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매제 박성기는 말했다. 심장병이 있는데 수술을 하지 않으면 낫기 힘들다고 하네. 이 말에 그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는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우다시피 했다. 동생 숙자가 걱정이 되어서가 아니었다. 자신도 언젠가 동생처럼 심장병의 포로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 일로 인해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내나 동네 사람들이 날 속 좋은 사람이며 호인이라고 평하고 있는 것이 위로가 되기는 된다. 나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아는 내면은 결코 호인다운 것이 아니다. 행동이 느린 것과는 정반대로 보이지 않는 누군가로부터 무엇인가를 독촉 받는 강박적인 상태가 매번 이어진다. 그래서 나는 조급증을 내서 한 가지 일에서 다른 일로 넘어갈 때 숨을 쉬지 않을 만큼 빠르게 넘어가고 갑자기 불안에 빠질 때는 곧 죽기라도 할 것처럼 허우적거린다.’
그런 때는 그가 생각해도 분별 있는 인간이라고 보아줄 수 없었다. 그는 아내의 말에 화를 벌컥 내며 도끼를 가지러 광으로 달려간 일도 있고 언젠가 창수가 대들었을 때 허리띠를 벗어 사정없이 두드려 팬 일도 있다.
마음을 다스리고 화를 내지 않도록 유의하리라! 심장병에 걸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엄격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자. 저녁 아홉 시경이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들고 새벽 4시면 일어나서 하루 일과를 시작하자. 그런 생활은 절도 있게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안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 때마다 그는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하고 난 후 편안한 기분을 찾기 위해 새벽에 홀로 깨어 있었다.
마침내 자신은 건강하다는 확신을 얻은 동섭은 안심했다. 그러자, 비로소 동생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것에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사실 친정에서부터 병이 있었다면 숙자는 친정으로 돌아와야 했을지 몰랐다.
“오빠, 어서 와! 박 서방은 면에 나가고 없어요. 시아부지하고 맨 날 싸움서도 그 놈의 이장은 뭐헌다고 매년 허는 지, 늘 집안 일은 뒷전이고…… 참, 아부님한테 가봐야제요. 어서 들어가요”
여동생은 작은 키에 조금도 곰살궂지 못하고 꼿꼿하게 보인다. 동섭은 마당을 걸어간다. 넓은 마루의 왼편이 부엌이고 오른편 끝이 사돈장의 방이다. 가운데 있는 두 개의 방이 여동생 부부, 자식들이 사용하는 방이다.
오른쪽 갓방으로 여동생이 먼저 들어가자, 동섭도 뒤를 따라 들어간다. 햇빛이 한 점도 들어오지 않아 한동안 사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노인네들의 방에서만 맡을 수 있는 음산하고 퀴퀴한 냄새가 가득하다.
“아부님, 월암에서 오빠가 왔어요.”
숙자는 어둠 속에서도 시아버지가 앉은자리를 찾았는지 아니면 평소의 짐작대로 자리를 가늠하고 말하는 것인지, 또박또박 노인네가 알아듣기 쉽게 말한다. 곧 어둠 속에서 말소리가 들려오고 사돈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보통 사람보다 기골이 크고 장대한, 허연 수염을 길게 기른 사돈은 뒷문 옆에 앉아 있다. 혈기가 많은 무관의 피를 이어 받은 사돈의 걸걸한 목소리에 동섭은 기세가 눌리는 기분이다.
“그래, 어서 오게. 집안은 다 편허제?”
“예, 그냥 저냥 그렇지요.”
동섭은 절을 올리려고 하지만 사돈장은 한사코 사양한다.
“오빠가 홍시를 좀 가지고 왔는디 지금 좀 드실랑기요?”
숙자는 동섭이 들고 온 네모난 상자를 싸고 있던 보자기를 푼다. 대나무로 만든 상자 안에는 그가 지난 가을 처가에서 가지고 와 독에 보관해 두었던 홍시가 곱게 담겨져 있다. 그것들은 얼고 풀리는 동안 색다른 맛을 간직하게 된다.
“뭐 이런 걸 다 가지고 오시고……나중에 쉬었다가 심심할 때 묵게 거기 놔두라.”
숙자는 보자기를 풀다가 그만두고, 보자기에 싼 상자를 윗목 구석으로 밀어놓는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온다. 몇 줄기 햇살이 마루를 비춘다. 햇빛이 비치지 않은 부분은 윤기가 없이 메마른 것처럼 보인다. 두 사람은 마루를 걸어 안방으로 향한다. 숙자가 방문을 연다. 마루와 방 사이에, 이 지방의 농가들과 달리 덧문이 하나 더 달려있다. 이 집은 조선시대 부유한 중인의 집이었다.
여동생의 일곱 살짜리 막내딸 미리가 텔레비전 앞에 웅크리고 있다. 동섭은 미리가 외삼촌이라고 부르며 달려올 것을 기대해보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 그는 애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런 광경을 일부러 연출해 본 적도 없다. 그는 과거 양반의 법도에 따라 살고 있다. 미리는 동섭을 보자마자 어머니에게 쪼르르 달려가 버린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큰 눈의 미리에게 동섭은 낯선 방문객일 뿐이다.
숙자가 저녁을 짓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동섭은 벽에 등을 기댄 채 텔레비전으로 눈을 돌렸다. 텔레비전은 월암에도 겨우 다섯 대 밖에 없는 귀한 물건이다. 문득 얼마 전 일이 그에게 떠오른다. 창수가 앞집 동열이와 함께 몰래 외상으로 텔레비전을 보러갔다가 들통이 난 적이 있었다. 다음 날 과수원집 막내아들이 텔레비전 시청료를 받으러 왔기 때문이다. 속이 상한 전주댁은 그 자리에서 과수원집 막내아들에게 30원을 주어서 돌려보낸 후 창수를 닦달했다.
“텔레비전을 보면 밥이 나와, 쌀이 나와!”
창수의 입을 통해 알게된 것이지만, 돈을 받고 텔레비전을 보여주는 행위는 분명 어른의 묵인 하에 벌어지는 아이들의 소행이었다. 한 프로그램만 보여준 후 아이들을 내쫓은 것만 보아도 그랬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도 전주댁은 그 집에 찾아가지 못했다. 과수원집 주인 방태수는 마을의 힘센 남자들도 건드릴 수 없는 사납고 고약한 인물이었다.
텔레비전 속에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의 풍경이 나타나더니 낯선 사람들이 나타나 우스꽝스러운 모습과 행동을 보였지만 동섭은 역겹게 느껴진다. 텔레비전이 사람의 마음을 끈다는 걸 그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영상은 여유 있고 평화로운 그의 머릿속을 한바탕 휘저어놓을 뿐이다. 스르르 눈이 감기는 것을 느낀 동섭은 밖으로 나온다.
30분쯤 후에 이 집의 큰딸 경서가 들어온다. 친구들 사이에서 경서가 끼지 않는 일이란 없다. 경서는 작은 키와 달리 야무지게 움직이는 입 때문에 ‘촉새’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외삼촌 오셨어요?”
“그래, 너 왔냐.”
경서는 어머니보다는 사교적이고 호탕한 아버지를 많이 닮고 있다. 그리고 부모들의 감정에 상관없이 동섭에게 친근함을 표시하는 유일한 생질이다. 경서는 그의 앞에 앉아 영수와 창수 소식을 몇 마디 물은 후 뒷방으로 건너간다.
박성기는 저녁 무렵에야 집에 들어왔다. 박성기는 동섭이 온 것을 알자 호들갑스럽게 반기며 어서 식사를 하자며 권한다. 박성기는 볼이 좀 패였지만 말라 보이는 얼굴은 아니다. 목소리는 좀 쉰 편인데 그럼에도 호인다운 인상에는 변함이 없다. 눈동자에도 서글서글함이 넘친다. 난 매제를 닮을 수는 없을 것이다. 동섭은 이런 생각을 한다. 그 때 한숙자가 큰 딸 경서를 불렀다. 숙자는 경서에게 상을 들려 먼저 작은방으로 보낸 후 큰방에 상을 들고 들어가도록 한다.
“자, 어서 드시오!”
“아, 예.”
매제의 말에 동섭은 수저를 든다. 상에는 시래깃국, 김치, 동치미국, 그리고 산간지방에서는 귀한 갈치와 고등어가 몇 토막 올라와 있다. 생선은 소금에 파묻혀 팔령치를 넘어온 것들이라 부드럽거나 연한 맛은 없다. 성기는 먹는 도중에 몇 번이나 동섭에게 많이 드시요, 밥이 모자라면 더 드시고, 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동섭은 문득 아쉬워진다. 이런 매제와 친밀한 관계를 맺어둘 걸 싶다. 동섭에게도 호탕한 시절은 있었다. 그는 이십 대에 갑장들과 밤새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골목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농을 던지고 술 한 잔 하자고 끌곤 했다.
“많이 드시오.”
먼저 식사를 끝낸 성기는 숭늉을 들고 윗방으로 건너간다. 성기는 마이크 앞에 앉자 앰프 받침대 아래 놓아두었던 네모난 깡통을 끄집어낸다. 성기는 몇 개의 캅셀을 입안에 털어 넣고 숭늉을 마신다. 동섭은 매제의 건강이 좋지 않나 싶지만 무슨 약인지는 묻지 않았다. 동섭은 약을 거의 먹지 않는다. 감기에 걸릴 때에도 결코 먹지 않는다. 그것이 동섭이 건강한 비결이다.
“이장님!”
밖에서 들여오는 소리였다. 성기가 방문을 열자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온다. 동섭도 몇 번인가 마을 저수지에서 본 적이 있는, 앞머리가 훌렁 벗겨진 노인이다.
“자네 혹시 오늘 우체국에 일이 있는가 싶어서 말이여.”
“우체국에 무슨 일로요?”
“아들놈이 송금을 했다는디… 여기 소액환이 있은께 좀 찾아다 주게.”
노인은 손에 들고 있던 종이 조각을 내민다. 사실 시골의 이장은 동네 사람들의 아주 자질구레한 일까지 처리해 주고 있다. 심지어는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대신 출생신고도 해 주고 있다. 성기가 소액환을 받아 액수를 확인했다. 일을 마친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동섭을 힐끗 보더니 나가려던 발을 멈춘다.
“아니, 자네가 어쩐 일인가?”
노인이 먼저 동섭을 알아보았다.
“예, 좀 다니러왔습니다.”
“자네 조부는 참 훌륭하신 학자셨는데, 자네를 보면 왠지 그 분을 뵌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구만 그래.”
동섭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도 조부를 기억하는 분이 살아 있었다니. 동섭은 자손으로서 긍지를 느꼈다. 동섭의 조부, 한수명은 남원, 운봉, 함양에서 시인으로 학자로 이름을 날렸다.
“자네 조부가 아주 뛰어난 문장가셨다는 것은 들었겠지만 아주 뛰어난 낚시꾼이라는 건 잘 모를 걸세. 지금도 월암 저수지 가에 앉아 해질녘까지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계시던 모습이 눈에 훤하네. 나도 어릴 적부터 그 양반이 낚시하는 걸 봄서 커 그런지 지금껏 낚시에 취미를 가지고 있지. 그런데 자네 조부는 우리 같은 사람하고는 좀 다르시지. 구름이나 바람의 움직임이나 새들을 보며 날씨를 읽고, 물의 온도나 계절에 따라 움직이는 고기들을 훤히 알고 계셨지. 그리고 낚시뿐이 아니라 달이 사람이나 동물에게 미치는 영향 같은 것도 알고 계셨어. 정말 모르는 것이 없는 양반이었어… 헌데 조부는 간간이 시조를 읊으시며 옆에 있던 낚시꾼에게 화답을 요구하기도 하셨지. 하지만 낚시터에 오는 사람 중에는 그 분만한 문장이 없어서 화답을 할 수 없었어.”
동섭이 알기에 조부가 낚시를 즐긴 것은 사실이었지만 조부는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구영리 박 부잣집에서 보냈다. 장모도 두 사람이 시조를 하는 것을 거의 매일 들었다고 했다. 설마 우리 딸을 그 집 손자와 혼인시킬 줄 생각지도 몰랐다는 덧붙임과 함께.
이야기를 끝낸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섭은 노인의 모습이 마당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동섭은 조부 밑에서, 공부하던 때를 떠올렸다. 그 다음 날 있을 운을 미리 알려주고 이러이러한 식으로 글을 지으면 될 것이라고 말하던 조부의 단정한 모습이 눈에 잡힐 듯했다. 조부가 서당선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학동들 앞이라 곧잘 얼고 당황해서 글을 잘 짓지 못했다.
“매제.”
동섭은 아쉬운 소리를 하려고 하자, 자기답지 않다고 느꼈다. 여태 그는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을 것처럼 뻣뻣하게 굴었다.
“자네 까끔에 가서 나무를 좀 하면 안 될까 싶어서 찾아왔네.”
“아, 그러세요. 근디, 우리 산이 어디 있는지는 아는가요?”
“그거야 알제, 요새 땔나무가 없어서 말이여. 그리고 아무리 처남 매제 지간이지만 자네 허락이 있어야 산에 가 볼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