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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산호 Jun 25. 2024

무대일가 4

1부 -4

      4     

  추석이 가까워지기 얼마 전부터 삼 형제는 그날을 손을 꼽아가며 기다리고 있다. 아이들에게 있어 명절이란 배불리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어쩌면 새 옷을 얻어 입기도 하는 그런 날이다. 그 기분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나이가 들기 전의 전주댁도 명절이 다가올 때마다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고, 많은 음식과 용돈, 옷가지를 머릿속에 그렸다. 그것이 혼인을 하고 자식을 낳으면서 바뀌었다. 환상은 시들해지고 현실은 냉엄했다. 명절은 큰 비용을 들여 넘어야 하는 산이고 여러 가지 잡다한 것을 준비하고 몸을 움직이는 수고를 해야 하는 일이었다. 


  삼 형제가 한 달 전부터 ― 아니 그 전부터,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장녀인 명자였다. 명자는 부산에서 방직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만 되면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들에게 선물을 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큰딸이 선물을 사 들고 집이랍시고 돌아올 때마다 전주댁은 여전히 받는 데 익숙하지 못함을 깨달았다. 동섭도 그랬다. 누구에게 무엇을 잘 건네지도 받지도 못했다. 동네 누구에게 인심을 쓴다고 해봐야 고작 막걸리뿐이었다. 

  상 장수를 시작하면서 전주댁은 고작 세 살인 명자를 처갓집에 맡겼다. 그러니까 그녀가 딸과 함께 산 시간은 고작해야 3년이 못 된다. 애가 우는 것을 달래기 위해 축 늘어진 빈 젖을 빨렸다는 어머니의 말이 때때로 그녀에게 떠올랐다. 젖을 뗀 명자에게 쌀을 갈아서 먹였어. 애가 울면 엄마를 찾으면 곧 온다, 며칠 있으면 온다고 달랬어. 


  명자는 다른 외손자들이 질투를 느낄 정도로 외조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자랐다. 어린 명자는 부모의 사랑을 기대할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 두 사람에게 매달리는 것이 옳고, 어떻게 하면 외조부모의 관심을 묶을 수 있을까 고심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동섭 내외가 상 장사를 그만둔 후 데려오려고 갔을 때, 명자는 외갓집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명자는 외조부모를 친부모로, 외갓집을 자기 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임춘복 여사도 계속 키울 뜻을 비췄다. 그래서 전주댁은 그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데리고 있어 봐야 자식에게 고생이 될 뿐이었다.

  명자가 외갓집을 떠난 것은 16, 7세 무렵이었다. 교회에 부설된 통신 중학교를 졸업하더니 친구들과 함께 객지로 나갔다. 그러면서 집으로 편지를 보내고, 명절 때마다 집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전주댁은 이제 명자가 철이 들기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추석 전날이다. 명자는 저녁 막차를 타고 월암에 도착했다. 버스가 도착하기 몇 시간 전부터 회관 앞마당을 서성거리고 있던 삼 형제는 누나가 버스에서 내리는 것을 보자 기쁨에 넘쳐 주위 사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누나, 누나!”

하고 불러댔다. 명자도 동생들에게 손을 한 번 흔들어 보이고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손을 맞잡고 수다스럽게 떠들었다. 


  “나중에 만나!” 

 명자는 위뜸으로 올라가려는 친구들에게 큰 소리로 인사를 하고서야 가족들에게 다가왔다. 마을에 도착할 때마다 길게 울리는 버스 클랙슨 소리를 듣고 달려 나온 전주댁은 농촌 아낙들이 딸을 대할 때처럼 아이고, 우리 딸내미! 라든지 그간에 얼매나 고생했냐? 고 묻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차도 비좁을 건디 이런 것들을 어찌 다 들고 왔냐?” 

  갈색 정장에 초록색 구두를 신은 명자는 양손에 몇 개의 보따리와 커다란 액자를 하나 들고 있었다. 명자는 어머니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머니와 동생들의 손을 잡으며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반가움을 표시했다.  


  “어머이!”

  명자는 예전의 시골뜨기 말괄량이가 아니었다. 수줍음 많은 소녀가 그렇듯 새침을 떨 줄 알고 억지로라도 말을 꾸며 세련된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었다. 도회지 물 탓인지 피부는 새하얗게 바뀌어 있고 어느새 부산지방의 말투를 배워 따르고 있었다. 그래서 가족들은 이상스러운 억양에 몇 번이나 웃음을 터트렸다. 이 지방의 말도 전라도와 경상도 방언이 한데 어우러진 말이지만 그랬어예, 안 그랬어예 하는 따위의 어미는 사용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전 가족이 모여 저녁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나자, 명자는 손에 들고 온 보따리를 영수에게 방안으로 가져오도록 했다. 보따리 안에는 동섭에게 줄 지갑과 라이터, 전주댁의 원피스와 화장품, 남동생들에게 줄 가방과 옷, 신발이 들어있었다. 이 물건들은 분명 명자가 매달 받는, 적은 월급에서 얼마씩 떼어서 모은 돈으로 장만한 것들이 틀림없다. 이렇게 생각한 전주댁은 사슴처럼 애처로운 눈으로 딸을 쳐다보았다. 그녀도 이런 물건들이 딸이 흘린 무수한 땀과 바꾸어진 것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너를 넘들 겉이 잘 입히기를 했냐, 잘 멕이기를 했냐, 너 하나만 잘 지내먼 될 일을 갔다가 무슨 돈으로 집에 이런 것들을 사 오고 그래?” 

  “이런 재미도 없이 사람이 어찌 살아예?” 

  명자는 고개를 젓고 한껏 웃어 보였다. 


  명자는 벌써 삼 년째 타향에서 고만고만한 소녀들과 ―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친구이자 친자매처럼 지내는 ― 한방을 쓰며 낮은 임금을 지급하는 공장 생활을 하고 있다. 이런 명자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물론 금전이었다. 시골에서 도회지로 나간 대부분의 가난한 집안의 자식들이 그렇듯 현실에 눈을 뜰수록 자신이 불행했던 원인은 돈이라고 생각하고 돈에 악착스럽게 매달렸다. 


  언젠가 명자는 야간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말을 전주댁에게 한 적이 있었다. 노동에 지쳐 터벅터벅 자취방으로 돌아오노라면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동섭은 명자를 대견해했지만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돈에 대한 집착도 그랬다. 그는 돈이 없어 늘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그는 돈에 그다지 애타지 않았다. 무엇인가를 열심히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그랬다. 그는 때로 사람의 의지를 부정하고 있었다.


  추석날 아침이다.

  동섭은 방위상으로 북쪽인 안방 뒷문 앞에 차례상을 놓았다. 전주댁은 창수와 경수를 불러 음식을 나르게 했다. 동섭은 갈색 차례상 앞에 서 있다가 창수와 경수가 부엌에서 가지고 온 음식을 하나씩 목기에 담아 상위에 놓는다. 음식을 놓는데도 자리가 있다. 사람들이 제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제상 위의 빈 곳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검은 두루마기를 걸친 한동준이 아들 둘, 이복동생 둘을 데리고 나타났다. 

  “아직까지 안 차리고 뭐 하는가?”

  “인자 다 됐어요. 조금만 지다리먼 돼요.”

  동섭은 더듬거리고 있었다. 사촌 형은 몇 번 혀를 차더니 마루 위에 걸터앉았다. 집에 올 때마다 동준이 목에 힘을 주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동준은 앞집 아저씨 다음으로 한씨 집 안을 대표할 수 있는 연장자고, 조상의 업을 이어 교육자로 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한산댁과 사는 것은 약간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동준은 자식들 머리가 나쁜 것은 한산댁 탓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동섭이 감히 중학교도 꿈꾸어 보지 못한 때, 다섯 살이나 많은 동준이 농고를 다닐 수 있었던 것은 한상두가 일구어 놓는 살림 덕택이었다. 한상두가 유산을 많이 받은 것은 아니었다. 큰집 뒷바라지하기에 지친 한상두가 분가해서 나왔을 적만 해도 윗마을에 구걸하러 다닐 정도로 궁핍했다. 명망 있는 학자였던 아버지의 명성에 누가 될까 두려워 구걸한 밥을 옷 속에 숨겨서 석천길을 내려왔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한상두가 깨달은 것은 죽도록 일하고 모아야만 살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남의 집에 머슴으로 들어가 부지런히 일했고, 아내는 동네의 온갖 허드렛일을 하고 시간이 나면 길쌈을 했다. 


  두 사람이 부지런히 일하자, 살림은 하루가 다르게 불어났다. 하지만 첫 번째 아내는 그 살림을 누리지도 못하고 죽었다. 이후 한상두는 새로운 아내를 맞이하여 동준을 낳았다. 새로운 아내도 전처 못지않게 부지런한 여자였다. 이윽고 그의 집은 전주댁의 표현을 빌자면, 차차로 차차로 살림이 불어났다.


  농고에 들어간 동준이 겨울에 냉방에서 잤다는 것은 동섭이 믿기 어려운 것 중 하나였다. 이것들이 필시 동준이 지어낸 과장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동준은 집에서도 선생이랍시고 들에 나가 모 한 포기 심어 본 적이 없고 소 꼴 한 번 베어 본 적이 없는 위인이었다. 지나간 삶을 고생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인생을 날조하고자 하는 수작이었다. 누구에게 이런 것들을 배운 것일까. 초등학교 교사를 할 기회를 주었던 군사정부였을까. 동준의 태도도 그랬다. 그는 군사혁명이 아니었다면 동섭처럼 농사나 지었을 것이 틀림없는데 농부들 옆을 지나칠 때면 자전거 안장 위에 근엄한 얼굴로 앉아 페달만 밟을 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처음으로 자전거를 배워 얼굴을 갈거나 무릎에 빨간딱지가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동준은 같은 학교에 다녔던 명자에게 연필 한 자루 사준 적이 없었다. 그 근엄한 얼굴에 손상이 가해질까 두려워서였을까. 아니면, 원래가 전주댁의 말처럼 동준이 ‘띵발이’기 때문이었을까.  


  커다란 상 위에 5열의 과일부터 1열의 송편까지 다섯 줄로 배열되고 중간에는 포(脯), 전(煎), 탕(湯)이 놓여 있다. 이 배열법은 동섭이 조부로부터 직접 배우고 익힌 것들이다. 음식이 담긴 목기를 하나씩 놓을 때마다 서포동혜, 시접거중, 잔서초동 등을 외치던 조부의 모습이 그에게 떠올랐다. 동섭은 내외분씩 한 장에 쓴 지방을 벽에 붙였다.

  차례를 지낼 모든 준비가 끝나자, 아래뜸의 작은집에서 작은어머니와 영민, 성민 형제가 집으로 들어섰다. 

  드디어 차례가 시작되었다. 강신분향(降神焚香), 강신뇌주(降神酹酒), 참신(參神), 헌주(獻酒), 사신(辭神). 사람들이 일제히 재배했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만이 들렸다. 다들 무슨 생각으로 절을 할까. 동섭은 그런 생각을 했다.


  음복재배 후, 동섭은 종성에게 밤을 집어주면서, 작은아버지(한상두)로부터 그것들을 받았던 때를 생각했다. 이것은 조상과 후손과의 교감이라고 조부가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조상들의 영혼을 직접 느껴본 적도 어떤 계시를 들은 적도 없었다. 조상은 단지 존경하고 흠모할 대상일 뿐 신으로 격상시킬 존재는 아니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조상의 은덕이니 뭐니 하면서도 다들 인간의 삶은 육신이 사라지면 끝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4대 봉사라니, 이것은 정말 이상하다. 자손의 봉사를 받는 동안만 귀신이 존재하고 그 이후에는 사라진단 말인가. 그리고 왜 사람이 죽으면 그렇게 결박을 짓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다시 돌아와 재앙을 끼치게 못 하게 하려는 생각이 아니라면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동섭은 장차 있게 될 자신의 제삿날을 떠올렸다. 그에게도 아직껏 자식이 물 한 그릇이라도 떠 놓기를 간절히 소망이 남아 있었다.


  차례의 마지막 절차는 분축(焚祝)이다. 지방을 태우고 제상 위의 제수를 내리는 것이다. 참례자들은 마루와 마당에서 쉬는 동안 서로 지나간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최근의 일들을 서로 물었다. 이런 날이 아니라면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다. 같이 농사를 짓던 시절에야 늘 얼굴을 맞대고 살 수 있었지만 산업화 시대가 오면서 이들은 각기 다른 장소에서 다른 일을 하며 살아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명절!’이라고 동료 중 누군가가, 아니면 매스컴에서 외치면 자신에게도 돌아갈 고향이라는 것이 있음을 깨닫고 본능적으로 버스 터미널이나 역으로 달려가 표를 예매하는 것이다. 그런 후 약간 감상적인 기분으로 고향 산천과 어릴 적 친구들을 떠올리고, 의미심장한 태도로 자신의 뿌리에 대해서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고향에 내려올 때 그들의 표정은 약간 상기된 듯하면서도 진지해 엿보이는 것이다. 


  반면 이들이 고향을 떠날 때의 표정은 내려올 때와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의식이 끝난 후 막 도취에서 깨어난 신자들처럼 어안이 벙벙한 상태에서 자신들이 왜 고향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지 의심하며, 자신들이 없으면 결코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여겨지는 도시의 구조물 속으로 복귀하고 싶어 안달한다. 이때 누군가 과연 도시 생활이 바쁘기는 바쁜 모양이구먼, 하고 말하면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도시 생활이라는 것이 다 그렇지요, 이제 차례도 모시고 친구들도 봤으니 올라가야지요.  


  아재인 영민이 종성에게 뭐라고 소곤거렸다. 아마 영수가 없다는 말일 것이라고 동섭은 생각했다. 영수가 조상신 대신 예수 귀신을 섬기고 있다는 것은, 이 동네 사람이라면 모두 다 아는 이야긴데 서울에서 왔기 때문에 듣지 못했을까. 종성은 대답 대신 영민을 끌고 마당을 걸어 나갔다. 영수가 집을 빠져나간 것은 어젯밤인데 동섭 내외는 그걸 알고도 막지 않았다. 영수가 집에 있어 보아야 서로 난처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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