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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산호 Jul 16. 2024

무대일가 8

 

“성, 영화는 언제 보여 줘?”  


  경수의 어리광 섞인 말에 영수는 언제 그런 약속을 했냐는 듯 딴청을 피웠다. 


  “화학을 하는 사람들은 참 인내심이 많아요. 화공약품 냄새는 발 냄새보다도 독하고 머리가 아프기로는 망치로 얻어맞은 것보다 더 아프거든요.”  


  영수의 이야기는 곧잘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초등학교 다닐 때의 영수는 친구들의 우상이었고 전교회장도 지냈다.  


  영수의 이야기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지만 동섭은 문득 불안한 기분을 느꼈다. 은근슬쩍 장난처럼 본심을 흘려 놓는 화법, 지금 영수가 그 수법을 쓰고 있는 듯해서였다. 그도 그런 화법을 쓴 적이 있었다. 그것은 상대로 하여금 가급적 충격을 받지 않도록 배려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었는데 그다지 좋은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웃음은 웃음으로, 장난은 장난으로 대응할 뿐 그 속에 뼈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머리카락이 쭈뼛하게 서는 것을 느낀 동섭은 이왕 학교엘 갔으니 마칠 때까지 열심히 해 보거라, 하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좀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토요일 밤이 지나도록 별다른 일은 없었다. 전주댁이 학교에 잘 다니고 있느냐, 고 물어도 영수는 별 반응 없이 그저 예, 라고 대답했다. 영수는 다음 날 오후 이리로 떠났다. 하지만 2주 후에 그는 자신의 예상, 좋지 않은 것에서만 효험을 발휘하는,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아야 했다. 영수는 부담스러운 동섭 대신 전주댁에게 넌지시 말을 던졌다.  


  “전, 아무래도 화공과가 체질에 맞지 않은가 봐요.” 


  “그래도 이왕 학교엘 갔으니 마칠 때까지는 열심히 해 보거라. 누구든지 입에 맞는 떡이란  없응께.”  


  고춧잎을 가리던 전주댁이 무심코 말했다. 영수가 좀 더 진지해졌다.  


  “일단 그 약품들 냄새를 맡을 수가 없고, 그 학교 졸업해 봐야 별 희망도 없어 보여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여?”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전주댁의 표정이 달라졌다.  


  “혹시 지금이라도 과를 바꾸먼 안되냐?”  


  영수는 고개를 젓자, 동섭은 눈을 감았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일이 사실이 아니었으면. 이미 예감은 하고 있었지만 그도 이런 식으로 불길한 일이 다가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 일은 영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 가족이 영수가 졸업하여 돈을 벌게 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글쎄, 어째서 네가 그런 과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모르겄다, 잉! 절 집 아들은 기계과에 잘만 다니고 있는디… 혹 니가 실력이 떨어져서 그렇게 된 것이 아이냐?”    


  “제가 그 녀석보다 더 성적이 좋았어요. 그리고 희망과를 물었을 때 전자과라고 했었는데 왜 머리 아픈 냄새만 나는 화공과에 떨어졌는지 모르겠어요.”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이 어디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는 형편이냐? 네가 공고를 간다 길래 그래, 이놈이 그래도 집안 생각도 허고… 그러먼, 그 정도라먼 힘들어도 보내봐야지 생각을 했는디 인자 지금 와서 네가 이러먼 어찌돼냐?”  


  전주댁이 애원조로 매달렸다. 동섭은 이것이 못마땅했다. 자식에게는 좀 더 뻔뻔스럽고 당당할 필요가 있었다.  


  “어쨌든지 간에 저는 인문계에 가고 싶어요. 도저히 못하겠어요.”   


  “야, 야! 그래, 정 네가 그렇게 할 작정이먼 핵교는 무슨 돈으로 다닐 것이냐? 네 계획이 있으먼 한번 들어나 보자.”   


  “제가 지금 돈 벌 능력이 있겠어요? 부모님이 대주셔야지요.”  


  더 이상 화를 참을 수 없게 된 동섭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야, 이 놈아! 네 신세 네가 알아서 해! 나는 못 보내준께. 인문계를 가든 인문계 할애비를 가든 네 맘대로 해!”  


  동섭은 아버지로부터도 늘 이 말을 들었고, 자식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말로 생각해 왔다. 이런 냉정함이 자식의 자립심을 길러준다! 영수는 들은 체도 않고 어머니에게만 매달렸다. 영수가 이런 이유를 동섭도 잘 알고 있다. 그는 한 번 아니라고 말하면 절대 번복하지 않았다. 옳든 그르든 사람은 지조, 가장에게는 권위가 있어야 했다.  


  “느그 아버지한테 말해 봐.”  


  “아부지하고는 말이 돼야 하제.” 


  “글고 그럴 만한 돈이 우리한테 어디가 있냐? 아부지한테 다시 이야기 해 보마.” 


  이 말은 단지 시늉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영수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영수는 끈질지게 어머니를 몰아붙였다. 두 사람을 보며 동섭은 생각에 잠겼다. 장남이었지만 부모로부터 제대로 자식 대접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동섭은 영수에게 그가 받지 못한 장남 대접을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장남에게는 관대해지려고 노력해왔고 모든 것을 허용해주는 쪽으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 생각은 영수가 예수를 신봉하겠다고 나서면서 틀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영수를 자식으로 생각지 않기로 몇 번이나 다짐했었다. 


  그런데 영수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동섭의 생각이 약간 바뀌었다. 한번 머릿속에 틀어박힌 예수라는 것을 몰아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도 알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수가 학교를 졸업한 후 직장을 잡고 동생들을 돌본다면 예수 같은 것이야 살아가는데 별다른 지장을 줄 것 같지 않았다.  


  “혹시 신학교 갈라는 거 아이라?”  


  어머니의 말에 영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영수는 경쟁자였던 친구들이 다니고 있는 인문계에 가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런 학교는 나중에 제가 혼자 벌어서 가도 늦지 않아요.” 


  동섭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영수가 신학교를 가든 가지 않든 그것은 나중 문제였다. 다시 인문계를 가려면 한 해를 그대로 보내고 다시 학교에 입학해야 할 것이고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런데 영수는 이미 제나름대로 부모를 설득했다고 생각했는지 학교를 그만둘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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