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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산호 Jul 23. 2024

무대일가 9

 

한상현이 죽은 지 2년이 지났다.  


  초상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부터 마을 사람들이 한씨 집으로 몰려들었다. 지난해의 제사가 소상(小祥)이었다면 이번은 대상(大祥) 즉 마당제사였다. 한씨 가는 고례의 상중제의대로 상복을 입고 있다가 다시 탈상 때 소복으로 바꾸어 입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 복잡하고 까다로운 절차를 지키는 집은 이제 거의 없었다. 궤연을 모시지 않는 집도 흔했고 백 일만에 탈상을 하는 집도 많았다.  


  늘 이런 행사 때마다 그랬던 것이지만 대상이 눈앞에 다가오자 동섭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잠을 설친 탓도 있지만 몽롱한 기분으로 오전을 흘려보냈다. 오후가 되면서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가 우려하는 것은 동생들이 또 한바탕 난리를 칠까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내려오지 않기를 바라는 일은 요행을 바라는 것밖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들도 대상 날을 분명 기억하고 있을 것이고 어김없이 제 시간에 도착할 것이 틀림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동섭은 작은방에 들어가 볼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그 때 그는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그 때까지 본 적이 없던 신비한 물건들에 호기심을 느꼈다. 누런 돋보기안경, 검은 가방 속에 든 편지뭉치, 쑥뜸을 할 때 사용하는 기구. 이것들을 만져보기도 하고 쑥뜸하는 도구는 자세히 살펴보고 눌러보기도 했다.    그것들 중에 그를 사로잡은 것은 백만 원 당첨금액의 주택복권이었다. 아버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빨간 행운번호를 보며 일확천금의 꿈을 꾸었을까. 말상대를 해 주는 영감들이 있기는 하지만, 가슴에 자극을 줄 것이 필요했는지도 모르지. 이것들이 가져다 줄 예기치 않은 행운을 생각하면 얼마나 가슴이 벅찼을 것인가. 그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복권이 당첨된 적은 물론 없었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본인이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리 없었다. 늘 오던 영감들과 동네방네 다니며 법석을 떨었을 것이다.  


  일차적으로 궤연(几筵)에 모셔졌던 물건들은 머지않아 불에 타서 사라질 것들이다. 그렇지만 한상두가 소유하고 있던 서적은 불에 던져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손수 붓으로 필사한 책이나 개인문집이었다. 그것은 한상두의 소유가 아니라 가보였다. 선대로부터 받은 유산이었고 동섭도 자식들에게 물려주어야 했다.  


  동섭은 서적과 문집을 넣은 궤짝을 도장방에 모셔 두었는데 어느 날 보니 책에 습기가 차 있었다. 그는 이것을 작은방 처마 밑에 비닐을 깔고 모셔 두었다. 햇빛에 내어 말리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시골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던 고서 수집장이의 눈에 띄었다. 수집장이는 한 눈에 그 책들의 가치를 알아보았고 그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 책들을 팔라고 애원했다. 동섭은 아무리 많은 돈을 주어도 그 책을 팔 수 없다고 했다. 그것은 그의 소유가 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렇지만 말쑥하고 약간 나이가 들어 보이는 수집장이는 그가 들에 나간 틈을 타서, 도장방으로 옮긴 궤짝 속의 고서를 훔쳐 가버렸다. 6개월 전의 일이었다.


  오후 2시가 되었다. 동섭은 마음이 심란해졌다. 그는 일을 거들러 온 사람들의 부산한 움직임을 보다가 상주임을 잊고 이곳저곳 기웃거렸다. 어느 새 오후 3시가 되었다. 갑자기 집 입구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서둘러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막 검은색 자가용에서 내린, 대전에서 살다가 서울로 이사 간 두 동생과 어머니가 보였다.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낀 순간, 그는 가볍게 비틀거렸다. 다행히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기에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는 않았다.  


  전주댁도 동섭과 약간 다른 이유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일행이 마을에 자가용을 타고 금의환향을 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일은 동네가 생기고 처음이었다. 기사까지 대동하고 대영 골짜기에 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광경은 동네 사람 누구에게나, 그들이 돈을 많이 벌었거나 상당한 출세를 한 것이라고 추측하게 만들 것이다.   


  일행은 차에서 내리자 마치 저명인사처럼, 환영하는 마을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며 집에 들어섰다. 동섭과 맞닥뜨렸을 때에도 그랬다. 동휘와 동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아주 유쾌하게 인사를 했다. 정말 뭔가 이상하다. 동섭은 그렇게 느꼈다. 어머니 파평윤씨도 뭔가 달랐다. 아주 낭창낭창하고 교양 있는 목소리로 동섭에게 별 일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키지 않았지만 동네 사람들의 이목이 있기 때문에 억지로 반가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일행을 방으로 안내했다.  


  잠시 후 동휘와 동규는 전에 초상이 났을 때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백배사죄했다.


  “정말 저희들이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죄송합니다. 형님, 형수님!”


  동섭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평소보다 표정이 더 굳어있음을 느꼈다. 전주댁은 그래도 적당히 대꾸를 한 건 전주댁이었다. 그녀는 사람인 이상 무조건 외면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것 좀 받아주세요. 저희들 성의입니다.”  


  동생들은 포장지에 싸여진 두 개의 선물을 동섭 내외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결정을 하지 못하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동섭은 사람들의 이목이 선물에 집중된 것을 보았다. 이럴 때 그는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전주댁도 어리둥절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동휘가 너스레를 떨며 포장된 상자 속에서 시계를 꺼낼 때까지 응답이 없었다.  


  그 때 옆에 있던 동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한마디씩 거들었다. 개인적인 생각이 깃들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자네는 좋겠구만, 이런 선물도 다 받아보고…….”


  내게 하는 말이던가, 동섭은 생각했다.   


  “전주댁도 참 좋겠어, 좋은 시동생들을 둬서…….”


  사실 선량한 동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화해였다. 그들은 동섭이 지난 일에 대한 앙금 때문에 모처럼 받게 된 선물을 물리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윽고 동생들이 손목에 시계를 채워주지만 동섭은 매몰차게 뿌리치지는 못했다. 전주댁도 시계를 채워주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사실 상대의 호의를 무시해서는 안 되는 때가 있고, 사람들의 눈을 속여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뭐, 이런 걸 다.”


  전주댁의 말에 동섭도 억지로 웃었다. 어쨌든 시계를 받고 나서 얼마동안 자잘한 이야기들이 오갈 여지가 생겼다.  


  “그래 말이여.”


  동섭의 말에 동네 사람들은 이제 형제간의 다툼이 막을 내렸다고 말하기도 하고, 이번 탈상은 아무런 분란 없이 넘어가리라 예측하기도 했다. 동섭도 그러기를 바라고 있었다. 사람도 동물이었다. 배가 고프지 않는 짐승은 더 이상 토끼나 사슴을 쫓지 않듯이 사람도 자신이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생각할 수 있을 만큼 호젓해지면 굳이 시빗거리를 만들어 싸움을 걸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상대로 분풀이를 하지는 않는다. 그런 극한 행동을 서슴지 않을 때는 대개 자신들의 처지가 불우하거나 비참할 때,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삶이 고달플 때이다.


  다사로운 분위기는 다음 날 첫 새벽에 제를 지내고 영좌를 철거한 이후까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사람들은 약간 마음을 놓은 상태에서 부지런히 음식을 만들고 날랐다. 분위기를 돋우는 사람들도 마음껏 재주를 펼쳤다.


  어느 새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사람들이 한 둘씩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샘에서 부엌으로, 마루에서 마당의 가마솥으로 뛰어다니던 아낙들도 집으로 돌아갔다. 가마솥 아래는 장작불의 불그스레한 화염만이 남아 있었다. 저번처럼 한밤중에 일어날 짜릿한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늦게까지 돌아가지 않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저녁 10시 무렵이었다. 케네디 공원 설립위원장이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동휘는 미국 대통령인 존. F. 케네디는 극우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것, 그의 진보적이고도 화해적인 정책이 우리나라에도 많은 추종자를 만들어냈다는 연설로 온 동네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다. 마을 사람들도 동휘의 연설을 듣고 케네디 공원은 반드시 만들어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연설이 끝난 뒤 동휘는 오랜만에 고향에 왔는데 매형 집에서 한 밤도 안 자고 갈 수 있느냐고 소매를 잡아끄는 박성기의 성화에 못 이겨 정자로 내려갔다.  


  그것을 본 동섭은 이제 별 일 없겠구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함을 떨칠 수 없었다. 사실 그는 선물을 사 들고 자가용으로 내려온 동생들과 품위 있는 자세를 고수하려는 어머니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해 믿음을 갖고 있지 않음을 증명해주는 행위라고 해도 그는 할 말이 없었다.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진실 대신 늘 저의를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지금껏 그는 살아있는 사람 중에 인간에 대한 회의를 품게 하지 않는 이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존경의 대상으로 남은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나 죽은 사람들뿐이었다. 인간사이의 일이란 늘 예측할 수 없다, 사람은 가장 즐겁고 재미있는 때를 경계해야 마땅하다! 동섭은 집을 나섰다.  


  골목으로 나온 동섭은 뒤를 돌아보았다. 지난 초상 때와 달리 동네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 버린 집은 낮에 사람들이 몰려 왔다가 돌아간 흔적이 엿보이지 않았다. 마루에 60촉 짜리 전구가 훤히 켜진 집은 어찌 보면 괴괴하기조차 했다. 저 속에 살고 있는 자는 사람이 아니다. 짐승이다. 나도 짐승일지 모른다. 그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앞집 아재네 집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자다가 그는 불쑥 눈을 떴다. 좀체 없던 일이었다. 한 번 잠에 빠지면 그는 중간에는 거의 잠을 깨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을 깨우지 않게 조심조심 아재네 집을 빠져나왔다.  


  골목을 걸어가는 동안 고요함이 동섭을 덮쳤다. 집으로 가까이 갈수록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자신의 예감이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인간이란 작자는 믿을 수 없어. 그는 봉창에 난 문구멍을 통해 안을 엿보았다.      


  “형수님, 내가 어떤 놈인지 압니까? 인간 한동규, 무시하면 어찌 되는지 압니까?한동섭,  한동섭! 어디 갔어?”  


  “어디 성님 보고 그렇게 불러?”  


  전주댁이 아이를 꾸짖듯 시동생을 타일렀다. 동규는 잠시 말이 없더니 더 이상 동섭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 대신 손으로 방바닥을 치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야, 임마! 잠만 자지말고 어서 부엌에 가서 칼 가지고 와!”  


  창수는 자는 것 같았다. 창수야, 일어날 필요는 없다. 자거라! 동섭은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동규가 잠들어 있는 창수에게 다가갔다. 창수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칼을 뭐 할라고 그래?”


  “서러워서 도저히 못 살겄어요. 이 자리에서 내가 죽어 버려야지.”  


  창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창수가 마루를 내려서는 것이 보였다. 마당을 걸어가는 창수의 걸음은 똑바르지 않았다. 아직도 잠에서 깨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창수는 모퉁이로 돌아가서 오줌을 누더니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동섭은 부엌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는 시들어 가는 그믐달과 약한 빛의 별들이 박혀 있었다. 다시 방안에서 한동규의 고함이 흘러나왔다. 칼을 가지고 오라는 고함소리는 아니었다.


  “열세 살 때 누가 군산 앞 바다에 나를 버렸제? 천지도 모르는 어린 아를 갖다가 부둣가에 내버린 사람이 바로 한동섭이여, 한동섭! 성수(형수)는 그 이야기 들었어, 못 들었어?”  


  동규는 숫제 반말로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전주댁의 말투에는 주눅 든 기색이 없었다. 전주댁이 아니었으면 이 집은 아마 지탱해오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껏 가정을 이끌어 온 것은 전주댁이었다. 그녀는 한껏 동섭을 위하고 또 달래며 용기를 잃지 않게끔 했다. 게다가 마을의 어떤 아낙보다 다부지고 부지런해서 해마다 살림을 늘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사태 때도 맥을 쓰지 못하는 남편을 대신해 시동생들을 대적해 싸워오고 있었다.


  “아, 그래! 큰성님이 그랬다, 이 말이제? 나도 자시 들은 적이 없어 잘은 모르겄지만, 그 때는 못 묵고 못 사는 때라 한 입 덜라고 바우네 집에 데리다 주었다든디?”  


  “그게 그거지 뭐요?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그럴 수 있어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지……”


  “그래도 그런 일을 어디 성님 혼자 생각만으로 그랬겄어?”


  “아무리 아버님이 그러자고 해도 큰성님이 되어 가지고 말렸어야지요. 그러면 안 돼제…내가 버림받고 난 뒤에 어찌 살았는지 알아요? 고생, 고생 말도 못할 그 고생을 말로 해도 다 못하고 설움, 설움 글로 써도 다 못해요. 그래도 내가 죽을 팔자는 아니었는지 도와준 은인이 있어서……그 은인이 아니었으면 나는 벌써 죽었어요. 누가 이런 내 인생 알기나 해요?”   


  “아, 그래 그래 참 고마운 분이구만, 그래!”  


  “아니, 그런데 왜 내 앞으로 된 논은 안주는 거요? 이 집만 차지했으면 됐지, 왜 내 몫까지 꿀꺽 삼키는 거요? ”


  “아, 이 놈이 술을 한잔 마시더니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이라, 이거! 아부님이 대구로 감서 다 팔아 가지고 갔는디 뭐가 남아 있어? 우리가 산 논은 나중에 우리가 돈 벌어서 위뜸 한아씨한테 산 거여,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구만, 그래!”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거! 아버님이 나 주기로 한 땅을 차지하고서는…… 한동섭, 한동섭! 어디 갔어?”


  “아니 왜 또 형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그래?”


  “야, 창수, 이 놈! 부엌에 가서 칼을 가지고 오라니까 왜 안 가지고 오는 거야? 어서 안 가지고 와! 나 오늘 저녁 여기서 죽고 말 테니까, 어서 가지고 와! 부모형제한테 버림받은 놈이 살아서 뭐하겠어!”  


  동규가 죽겠다고 외치는 것은 허세에 불과했다. 더 이상 소란은 없을 것이라고 여긴 동섭은 아재네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다음 날 아침 식사 후다. 일행은 말쑥하게 차려 입은 후 길 떠날 차비를 차렸다.  


  전주댁은 망설이다가 아래채 광으로 달려갔다. 선물까지 사들고 왔는데, 빈손으로 보낼 수 없었다. 그것은 사람의 경우가 아니었다. 전주댁이 자루에 찹쌀을 담고 있을 때 동휘가 바라지문으로 고개를 디밀었다.  


  “저, 성수! 돈을 좀 주시면 좋겠는데.”


  “무슨 돈이요?”


  동휘의 말에 얼굴빛이 변한 전주댁은 뚤방 위에 서 있던 동섭을 불렀다.  


  “즈그 아부지, 이리 좀 와봐요!”  


  무슨 일인가 싶어 동섭은 바라지문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갔다.  


  “삼춘이 자가용 대절비를 달라네요, 참나!”


  “그러먼 저 차는 누구차여?”


  “운전사 차라네.”


  동섭은 신음소리를 내며 입을 쩍 벌리며 신음소리를 냈다. 저 놈들은 결코 출세할 수 있는 놈들도 내게 살림 보태줄 놈들은 아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제, 지깐 놈이 무슨 돈이 있어서 자가용을 굴리고 왔겄어?”


  “그래도 어쩌. 동네 창피하게 돈을 안 줘?”      


  돈을 내 놓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는 녀석들을 당해낼 수 있을까,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힘들여 번 돈을 저 놈들한테.… 동섭은 사타구니에 차고 있던 호주머니를 꺼냈다.  


  광을 나오다가 동섭은 마당에 서 있는 동휘를 보았다. 동휘는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 중에서 가장 양순하면서도 비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잠시 후 일행은 부의 상징인 검은 자가용을 타고 동네를 떠났다. 그런데 그들이 가고 난 지 며칠 후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들이 사 온 두 개의 시계 중 동섭이 받은 것이 갑자기 정지한 것이다. 장날을 기다렸다가 시계를 수리해서 찰 수밖에 없으리라, 여긴 그는 인월 제일 시계방에 시계를 맡겼다.  


  다음 장날이 되었다. 동섭은 시계방에 갔다가 뜻밖의 사실을 들었다. 그가 화해의 선물로 동생에게서 받은 시계는 싸구려일 뿐 아니라 고쳐도 오래 쓸 수 없는, 겉만 새 것처럼 꾸민, 엉터리 시계였다. 집에 돌아와 사실을 전하자, 전주댁이 길길이 뛰었다.  


  “에이, 순 야바위꾼 겉은 놈들. 어디 사기 칠 데가 없어서 즈그 성님하고 성수한테 사기를 쳐? 고물상에서 헌 시계를 사 가지고 새 것인 것 겉이 꾸며 가지고 와서 사람들 앞에서 버젓이 시계를 채워 줘? ”


  전주댁은 평소의 말처럼 분이 나서 이렇게 외치며 버스를 타러 나갔다. 2시간 후 전주댁은 새 시계를 사 가지고 돌아왔다. 전주댁은 동섭의 손목에 시계를 채워주며 일행이 갔음직한 꽁무니에다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우리도 시계 하나 샀다, 이 놈들아! 우리가 그깟 시계 하나 살 형편이 안 돼서 지금껏 안  산 줄 알제? 일 허는 사람한테는 시계가 필요 없은께 안 샀다, 이 놈들아, 순 망할 놈들아!”


  그런 뒤 전주댁은 온 가족들이 보는 자리에서 시동생들이 사 준 시계를 들어, 서편 돌담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전주댁의 손을 떠난 시계는 허공을 날아가더니 몇 초 후 돌담에 맞고 에메랄드 빛 원판과 바늘, 은빛 몸체, 원형의 유리가 제각각 부서지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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