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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신 Sep 08. 2024

가장 뜨거웠던 여름과 가장 추웠던 겨울

여름과 겨울이 주는 계절의 온도는 같은 듯 다르다. 뜨거움과 추움이 꼭 여름과 겨울뿐이랴. 뜨거움이라면 열정이라는 말이, 추움을 생각하면 실패라는 말이 떠오른다. 살면서 가장 뜨거웠던 여름과 가장 추웠던 겨울을 꼽자면 이십 대 청춘의 추억도 있을 것인데 쉽게 생각나지 않아 당황스럽다.

지난 이야기를 꺼내어 들춰보는 것을 즐겨하지는 않지만 질문이 나를 들여다보게 다. 며칠 동안 이 물음 앞에서 서성였다. 지난날의 여름들은 뜨거웠고 모든 겨울들은 추웠다. 나는 불꽃처럼 살았으며 지금도 타오르고 있다고 마음을 다독였다. 그리고 이제 촛불이 스스로 태우면서 빛내고 사라지듯 사라진 날들이 남긴 흔적을 되짚어본다. 잘 안 보인다.


지금이 밝기에 지나간 날들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심리적 가림막이 가리고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잊고 싶은 뜨거운 여름날과 추운 겨울날들을 두껍게 일상의 두께로 묻어둔 탓일 수도 있다. 얼마 전에 천만 관객이 든 영화 '파묘'처럼 나를 파본다.

마침내 가장 뜨거웠던 여름이 나왔다. 나는 초등학생이라 어렸고, 책을 좋아하는 아이답게 시력도 알맞게 나빴다. 꽃무늬 수영복을 입었으며 때는 초등 5학년 여름방학이었다. 큰 사촌오빠를 따라 초등학생 사촌동생들이 바다를 갔다. 대천 해수욕장에 텐트를 치느라 사촌 오빠는 바빴다.


바다 안에 피라미 같은 물고기들이 있었다. 신기한 물고기들을 따라 물속을 탐구하던 나는 그만 사촌들을 잃고 우리의 텐트도 찾지 못했다.  텐트를 찾느라 길을 잃고 두어 시간을 헤매는 동안 작열하는 한여름의 대천 해수욕장의 햇볕은 수영복을 제외한 온몸에 화상을 입혔다.


정말 우연히 사촌들이 쉬는 텐트를 찾았는데 빨갛게 데인 나를 본 큰오빠는 너무 놀랐다. 온몸에 물집이 잡힌 화상 치료는 오래 걸렸으며, 지금까지 바닷물 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깊은 후유증을 남겼다. 어떤 가슴 설레는 추억이 아닌 햇볕 화상을 입었던 뜨거운 여름의 기억이다. 


가장 추웠던 겨울도 나왔다. 당뇨병 환자였던 아버지는 버스 교통사고로 중환자실에 계시다 신장이 망가져 투석을 하셔야 했다. 약 2년을 고생하시던 아버지는 설 연휴의  추운 날에 돌아가셨다. 다정했던 아버지를 선산의 얼어붙은 땅에 묻었던 그해 겨울 나는 꿈속에서도 자주 울었다. 내 삶에 하나의 깊은 줄이 그어지고 훌쩍 어른이 되어버린 추운 겨울이었다.


여름과 겨울 사이에는 봄과 가을이 있다. 모든 계절마다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대부분 사람들과 연결된 이야기들이다. 한 가지만을 선택하기는 어렵다.  뜨겁고 추움의 온도 중에서도 굳이 하나만을 추리려다 보니 왠지 지난 일들이 담담하게 느껴졌다.


오늘과 미래를 얘기하기에도 바쁜데 굳이 지난 일들을 소환해야 할까 망설였었다. 그러나 과거 없는 현재는 없다. 꽃무늬 수영복을 입고 해변을 헤매던 여름의 한낮과 사랑하는 아버지를 꽁꽁 얼어붙은 선산에 묻던 겨울의 아침도 지난 일이다. 추억의 꼭짓점을 찍었으니 거침없이 오늘을 살며 꿈의 내일로 달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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