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업
필드에서 세션으로 활동하는 이들 사이에는 그들만의 룰이 존재한다.
‘절대 경험 없는 어린 대타는 세우지 말 것.’
이는 곧 자신의 커리어와도 직결된다. 제 아무리 부르는 곳이 많아 이쪽저쪽에서 러브콜이 들어와도 줄을 서는 건 무척이나 중요하다. 방송계와 공연계 사이엔 겹치는 인맥들이 많아 밴드마스터에게 찍히는 날에는 그 어떤 곳에서도 일을 따 낼 수가 없다. 그러니 가능하면 밴드 마스터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런데 최근 아는 분이 대타 때문에 밴드에서 잘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밴드마스터의 눈 밖에 난 것이다.
그 사람이 대타를 세운 이유는 해당 시즌에 공연이 많아 자신과 같은 동급의 대타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급한 대로 자신의 대학생 제자를 세웠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실력이 없다고 볼 수 없었지만 자고로 세션일은 눈치와 센스로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몇 번 타이밍을 놓친 어린 대타는 그 길로 계속 필드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누군가가 필드에서 사라지는 장면을 마주할 때마다 그다음은 내가 아닐까 두렵기도 했다.
밴드마스터는 세션팀의 리더로서 일을 컨택하고 주최 측과 페이를 상의하는 중요한 직책이다. 밴드마스터의 악기 포지션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메인 건반이나 기타를 맡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세션 음악에 대해 전반적인 이해가 높은 악기 포지션이기도 하고 음악의 도입부를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경력이 농후한 나이가 많은 밴드마스터들도 있으나 더러는 젊은 밴드마스터가 있는 세션팀도 있다. 이 세계에서는 누가 페이 협상테이블에 앉아있느냐가 훨씬 중요하기 때문에 나이가 적더라도 예의를 갖춰야 한다. 어느 한 세컨드 건반 연주자는 밴드마스터가 한참이나 어려 연주스타일에 이러니 저러니 훈수를 두었다가 그다음 회차부터 다른 연주자로 교체되기도 했다. 여느 회사처럼 직급에 따라 대우를 받는 문화가 있듯 이 필드도 연차보다 직급이 우선인 셈이다. 나도 간혹 나보다 어린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었는데 그들에게 말을 쉽게 놓지 않으려 노력했다. 나이는 어려도 뒤에서 어떠한 커넥션으로 나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전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내가 일하면서 만났던 밴드 마스터들은 가장 어리고 힘없는 포지션인 코러스들에게는 너그러운 편이었다. 언젠가 한번 회식자리에서 밴드마스터와 단독으로 술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 같은 학교 선후배여서 나를 좋게 보고 계셨지만 날카로운 일침도 아끼지 않으셨다.
“이 일에 물들지 말고 네 음악 하려면 빨리 떠나. 돈은 잘 벌겠지만 네 음악을 할 순 없을 거야. 정신 차려. 나처럼 되지 말고.”
코러스들은 가장 쉽게 교체되고 밴드 구성원들의 입김이 가장 잘 닿는 자리이기 때문에 여차하면 잘리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나쁜 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쉽게 수혜를 얻기도 한다. 밴드 세션 팀 사이에서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담배 심부름도 다니고 식사가 끝나면 눈치껏 물을 떠다 드리고 요즘 재밌는 드라마를 추천해 드리며 오늘 공연의 일정표와 큐시트를 외워 브리핑해드리면 그다음 콘서트에 슬그머니 내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기실에서는 보통 스마트폰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데 그 시간에도 나는 선배가 심심하지 않도록 옆에서 라디오 역할을 담당하곤 했다. 가끔은 내가 웬만한 예능인들보다 더 말발이 좋은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입에서 단내 나게 썰을 풀어냈다.
나처럼 웃기는 애로 관심받을 게 아니라면 말 잘 듣는 애, 착한 애, 아니면 무제한데이터를 공유해 줄 수 있는 애로 자리매김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실력 좋은 사람보다 같이 일하기 편한 사람을 선호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