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짤지만 오래 남는다.
가을은 언제부터 이렇게 짧아진 걸까. 어린시절 기억 속의 가을은 훨씬 길었다. 운동회가 끝나면 아직 단풍이 절정이었고, 시월과 십일월 사이에는 한참 동안 선선한 바람이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여름의 무더위가 물러가기도 전에 갑자기 바람이 달라지고, 단풍이 물드는가 싶으면 금세 흩날려 버린다. 계절이 바쁘게 달려가는 사이, 가을은 길 위에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여행자처럼 느껴진다.
짧아진 계절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아쉬움에 젖는다. 마치 소중한 사람과의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시간이 다 되어 버린 듯한 허무함. 그러나 그 허무 속에서 나는 알게 된다. 가을은 짧아서 아쉽지만, 그만큼 오래 남는다는 사실을.
가을을 기억하는 방식은 늘 장면이다. 노을이 기울던 오후, 창가로 스며들던 바람, 커피잔 위에 내려앉던 따스한 햇살, 그리고 그 옆에 앉아 웃던 사람의 얼굴. 말이 많지 않아도 좋았다. 오히려 가을에는 침묵이 더 어울렸다. 말 대신 바람이, 잎사귀가, 햇살이 많은 것을 대신 전해주었다. 마음속 깊이 묻어 두었던 감정들이, 가을의 고요한 풍경 앞에서는 서서히 흘러나왔다.
그 순간들은 슴세 흘러가 버렸지만, 희미학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래도록 머물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노을빛이 번질 때마다, 그때의 공기와 감정이 다시 내 안에서 살아난다. 그래서 가을은 짧지만 오래 남는다.
우리는 늘 부족함 속에서 가치를 깨닫는다. 충분히 오래 머무는 것들은 오히려 당연해져 버리지만, 짧게 스쳐가는 것들은 더 깊이 남는다. 가을이 그렇다. 짧아서 아쉽지만, 그 아쉬움이 계절을 더 특별하게 만든다. 첫사랑의 설렘이 오래가지 않았기에 더 기억에 남듯, 가을의 빛깔도 오래 이어지지 않기에 더욱 강렬하다.
나는 가을을 통해 깨닫는다. 모든 만남과 순간이 길 필요는 없다는 것. 중요한 건 머무른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그 순간을 얼마나 온전히 느꼈는가라는 것이다.
나는 매해 가을이 오면 기록을 남긴다. 일기 속에는 풍경뿐 아니라 그때 느낀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단풍이 들던 캠퍼스의 길, 친구와 걸었던 골목, 혼자 앉아 있던 카페 창가의 오후. 짧은 계절 속에서 나는 가장 나다워진다. 작은 것에도 쉽게 흔들리고, 사소한 말에도 오래 머문다. 그래서인지 가을의 기억은 시간이 흘러도 내 안에서 여전히 따뜻하다. 다른 계절은 흐릿해져도, 가을만은 늘 선명하다.
짧다는 건 사라짐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오래 기억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잎은 떨어져도 마음속 풍경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것은 겨울이 지나 봄을 건너 여름을 돌아도 내 안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몇 해 전의 가을을 기억한다. 그때 웃고 울던 장면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계절이 주는 힘은 그렇게 오래간다. 단풍이 물들던 날의 공기,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던 소리, 하늘빛에 스며들던 쓸쓸함까지 모두 내 안에 남아 있다.
그 기억들이 쌓여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짧은 계절이 남긴 흔적이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안다. 가을은 잠시 머무다가도, 마음속에서는 결코 짧지 않다는 것을.
짧은 가을을 바라보면 나는 배운다. 모든 순간은 끝이 있기에 소중하다는 것. 사라짐을 두려워하기보다 그 순간을 온전히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사랑도 그렇다. 어떤 사랑은 오래 이어지고, 어떤 사랑은 짧게 지나간다. 그러다 짧다고 해서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짧음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 단단해진다.
가을은 우리에게 삶을 닮은 진실을 보여준다. 끝이 있음을 알기에 우리는 오늘을 붙들고, 순간을 사랑한다.
올해도 가을은 금세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짧음을 원망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그 순간들을 더 깊이 느끼고, 마음속에 오래 담아두려 한다. 가을이 주는 건 길이가 아니라 깊이다. 잎사귀 하나가 붉어지기까지의 시간, 그 앞에서 내가 느낀 감정, 그 감정이 나를 성장시키는 과정. 그것이 가을이 남기는 진짜 의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하늘을 올려다본다. 바람을 맞으며, 지금의 이 순간을 마음에 담는다. 언젠가 사라질지라도, 오래 남을 것을 알기에.
짧은 계절 앞에서 우리는 늘 아쉬워한다. 그러나 그 아쉬움은 곧 사랑으로 이어진다. 사라질 것을 알기에 더 깊이 품고, 흩어질 것을 알기에 더 간절히 바라본다. 가을은 짧지만 오래 남는다. 그리고 그 오래 남는 마음이 우리 삶을 단단하게 지탱한다.
언젠가 또다시 찾아올 계절을 기다리며, 나는 오늘의 가을을 기록한다. 오늘을 사랑하며,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서. 짧음은 사라짐이 아니라, 오래도록 기억을 붙잡는 힘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해마다 가을을 기다리고, 또다시 사랑하게 될 것이다. 나의 가을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