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막국수를 좋아한다. 아이를 가졌을 때마다 입덧을 심하게 하면서도 먹고 싶었던 고향의 막국수. 추운 겨울에 속 서늘하게 웬 막국수 타령이냐고 남편은 그런다. 속이 시리긴 하다. 목구멍부터 뱃속 깊숙하게 들어앉은 메밀과 밀가루가 서늘한 냉기를 뿜어내는 것 같다.
아 먹고 싶다! 절대 배 속에 아기는 없다. 안심하시길.
몇 날 며칠을 벼르다 벼르다 저녁으로 막국수를 먹으러 갔다. 휴일이 아니면 시간이 안 나니 오늘 안 먹으면 또 일주일을 기다려야 한다. 배달되는 막국수는 본 적이 없다. 쫄깃한 냉면과는 차원이 다른 뚝뚝 끊어지는 국수의 질감. 불어 터진 듯 불어 터지지 않는 면발. 달짝지근 시원한 국물맛. 식초와 설탕, 겨자와 국물을 알아서 조합해 먹으라는 자유로운 상차림. 나는 이 모든 것을 좋아한다. 허연 열무와 백김치의 깔끔함. 대신 온갖 것을 다 넣은 듯 정신없는 양념과 국물. 까만 김은 완전 포인트 내 입맛.
그런데 나는 왜 잊고야 말았을까. 나는 국물이 있는 막국수를 먹지만 오늘 시킨 이 맛이 아니다. 결코 내가 먹던, 뱃속의 아이가 원하던 그 맛이 아니었다. 매년 여름마다 입맛 다시며 먹으러 가고팠던 그 막국수가 아니다! 곱빼기로 시켰건만.
그래도 나름 식초를 넣고 설탕을 넣고 열무김치를 해서 열심히 먹다, 또 노랑 겨자를 넣어 물에 풀고 또 식초를 넣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나만 계란이 없지? 계란 먹은 기억이 없다. 왜 나만 계란이 없냐고 가족들에게 묻자 복동이는 내 그릇의 계란을 보았다고 했고, 옆에 앉은 복실이는 계란을 내가 먹었다고 했다. 흥건한 국물을 아무리 뒤적거려도 계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 계란이 있었던 것일까.
뭐 계란 정도야. 반 쪽짜리 계란을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이다. 계란을 입에 넣는 달복이를 보며 입맛을 쩝 다셨다.
비빔 막국수를 시킨 달복이는 매운 것을 잘 못 먹는다. 국수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지난번에도 막국수집에서 만둣국을 먹었는데 오늘은 비빔 막국수를 시켰다. 반 그릇을 맛있게 먹고선 배가 불러 더 이상 못 먹겠다고 나가떨어졌다. 그럼 비빔 막국수 맛이나 볼까? 육수를 더 부어서 후루룩 맛보니,
바로 이 맛이다!
내가 원한 막국수 맛! 얼마나 오랜만에 왔으면 비빔인지 물인지 기억을 못 한 것일까. 기억은 가물가물해도 비빔면에 냉 육수를 충분히 부어 말아먹는 이 맛. 벌건 국물 맛을 잊을 수는 없다.
곱빼기 물막국수를 몇 젓가락 남기고 그릇째 옆으로 밀어 두었다. 달복이가 남긴 비빔 막국수에 육수를 충분히 부어 맛있게 먹었다. 남은 물막국수 그릇을 다시 데리고 와 건더기를 비빔 막국수 그릇에 담아 호로록 흡입하고 빨간 국물이 마르고 닳도록 마셨다.
배가 터질 것 같다. 뱃살아 오늘도 미안하다. 물과 비빔을 기억 못 하는 바람에 뱃살에게 빚을 졌다. 꼭 기억하자.
나는 ‘비빔 막국수에 물 많이’ 먹는 사람이다.
오늘의 저녁을 대접해 준 아이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세뱃돈을 받아서 엄마, 아빠 밥도 사주는 멋진 녀석들. 이번에는 물과 비빔을 헷갈렸으니 다음번엔 꼭 비빔 막국수로 사주라. 엄마는 비빔 막국수에 물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