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는 아무리 용을 써도 주부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다. 집에서 탈출하여 하루 종일 살 수도 없다. 방학은 끝났지만 개학하여 새 학기는 더 바쁘다. 적응할만하면 또 금방 방학이 돌아올 것을 안다. 나도 이제 다 안다. 밥은 말해 무엇하고 빨래는 말해 무엇하며, 청소는 입이 아프다. 돌고 도는 인생 사.
주부탈을 벗고 싶다. 다른 수를 생각해야 한다.
주부란 집안일의 구렁텅이에서 뱅글뱅글 돌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저 하루 인생이 쳇바퀴 돌 듯 반복의 연속이니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 할까. 나의 이야기는 죽을힘을 다해 쳇바퀴를 돌리다 그저 힘이 빠졌을 때 잠시 내려와 늘어놓는 넋두리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넋두리와 같은 수다, 주부의 수다, 우리의 수다는 쌓아놓을 수 없다. 쌓이고 쌓이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숙이 파고 들어가 바다 밑바닥까지 나를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나는 그 깊고 축축하고 어두침침한 곳으로 다시 내려가고 싶지 않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늘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나를 구할 방법은 무엇인가.
수다는 나를 살린다. 옆에서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만으로 힘이 된다. 아이가 둘일 적에 친구와 전화 통화로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다. “정신과에 가서 상담을 한번 받아보자. 거긴 말을 잘 들어준대. 속에 있는 걸 좀 털어만 놔도 살 것 같아. ” 우리는 다행히 심리상담까지는 받지 않았다. 친구도 아이 셋을 연달아 낳고, 나도 아이 넷을 연달아 낳으며 일과 육아로 정신이 없었다. 멀리 있었던 우리는 가끔 전화로 60분을 넘게 통화 기록을 찍었다. 뭔 할 말이 그렇게 많았을까. 그냥 전화통만 붙들면 말이 술술 쏟아져 나왔다. 그나마 그런 통로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수다 덕분에 나는 아직 정신이 온전하다.
그리고 지금의 글이라는 수다를 만나서 더욱 감사하다. 글은 좀 더 심사숙고하여 수다를 풀어놓을 수 있는 도구다. 할 말 못 할 말을 조금은 가려 내뱉을 수도 있다. 친구만큼이나 마음을 털어놓기 좋다. 나는 창작열이 불타오를 정도로 수다를 풀어놓는다. 이것이 내가 살 길이라 여긴다. 수다를 늘어놓으면 주부의 탈을 벗을 수 있나? 그럴 리가.
주부라는 탈을 벗으려면 자연 순환의 고리를 벗어나야 한다. 깊은 생각으로부터 나온 주부의 수다는 무한 반복되는 생의 고리에서 빠져나와 잠시의 쉼을 줄 수 있을 뿐.
그렇다면 나는 주부라는 역할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바퀴를 부술까? 주부의 역할을 던져버릴까? 확 다른 것으로 변신한다면?
고심하던 중 헐벗은 나무 위 높은 나뭇가지에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든든하게 튼 새둥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기새와 어미새가 사는 둥지를 살펴보자. 아기새는 부리를 벌리고 어미가 주는 먹이를 받아먹는다. 어미새는 종일 날아다니며 먹이를 구해온다. 주부라는 탈을 벗어놓고 조금은 객관적으로 아기새와 어미새의 입장에 서서 둥지 안을 살펴보았다. 내가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갔을 리는 없고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둥지의 모습이다.
높은 나무 위에 새가 둥지를 틀었다. 새는 가느다란 나뭇가지와 지푸라기를 엮어 아담한 둥지를 만들고 그 안에 알을 낳았다. 곧 아기 새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어미새는 그때부터 하루 종일 밥을 물어 나르느라 바빴다. 아기새 네 나리가 뾰족하고 작은 부리를 벌리며 외친다. “밥 주세요!” “나 먼저!” 날지 못하는 날개를 퍼덕이며 먹고자 애쓰는 새끼들. 아기새는 생존을 위해 받아먹기 바쁘다. 아이는 먹는다. 어미는 먹인다.
멀리서 이 모습을 보는 나는 아기새도 되고 어미새도 되어 본다. 주부에서 벗어나 새 둥지를 구경한다. 사물이나 현상을 객관화하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나 보는 것으로부터 가능해진다. 나는 주부의 탈을 쓰고 있어서 주부의 입장에서만 생각했다. 나도 한 때 저 아기새였고, 또 한때는 날갯짓을 못하는 어린 새였다. 그리고 자라면 어미새가 될 테다. 나는 아기새이기도 하고, 어미새이기도 하다.
아기 새가 자라 엄마가 되는 당연한 이치를 주부라는 탈을 쓰고선 잊고 있었다. 힘겨운 날갯짓을 하며 종일 날아다니느라 어깻죽지가 아파 죽겠다며 골골거렸다. 주부의 탈을 쓰고 있어 나는 늘 그것이 억울하다 호소했다.
나도 한 때 아기였다. 부모의 보살핌을 받았다.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자랐다. 부모님께 내가 받은 커다란 사랑은 왜 잊었나?
내가 받은 사랑을 그대로 내 아이에게 물려주는 것이 그리도 억울할 일인가.
또한 나는 주부라는 역할에 너무 심취해 있다. 그래서 주부와 주부가 아닌 가족구성원을 철저하게 구분했다. 나와 타인, 나와 가족구성원들을 철저하게 나누고, 편 가르기 하고, 역할 구분을 한 것은 나였다. 주부라는 탈을 뒤집어쓰고 ‘주부전’이라는 마당극 한 판 신명 나게 펼쳤다.
이제 주부의 탈을 벗자.
바퀴를 부수지 말자. 받아들이자. 돌고 도는 게 인생사다. 가끔 바퀴에서 내려와 수다 풀이를 하자. 그리고 바퀴를 굴리는 주체가 되자. 외발 수레는 불안하니 두 바퀴, 세 바퀴, 네 바퀴를 만들어 굴리는 주체가 되자.
주부라는 이름을 자주 내려놓자. 가끔 그리고 자주 내려놓아도 된다. 나에게는 다른 이름도 많다. 엄마라는 이름도 있고 아내라는 이름도 있다. 사랑스러운 딸이라는 이름도 있다. 그리고 ‘나’라는 멋진 이름도 있다.
변신하라. 그것이 무엇이든!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지 않는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해도 된다. 중심을 잘 잡고 제 자리로 돌아온다면 말이다.
마지막 남은 된장국거리로 얼갈이배추된장국을 끓였다. 꼬마들이 ‘얼간이된장국’이라 부르는 우리 집 효자 된장국이다. 편수냄비에 물을 붓고 냉동된 국거리를 퐁당 넣고 된장 한 숟가락을 넣는다. 재료가 모두 소진되었으니 새로운 재료를 시켰다. 다시 박스 주문을 했다.
얼갈이배추 4킬로그램
브로콜리 2킬로그램
미니 파프리카 2킬로그램
포항초 2킬로그램
야채 거부자 복이는 브로콜리를 두 개나 먹기도 했다. 입에도 안 대는 빨강, 노랑 파프리카도 두 개 집어 먹었다.
식사 준비를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루지 못할 성과다. 나의 꾸준한 노력이 식단을 바꾼다. 그리고 가족의 건강을 지킨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었던 신파극 <주부전>
제목 좋군. 바꿀까 봐.
<주부공감> 끝!!
주부 글을 자꾸 쓰니 집안일을 너무 열심히 하게 된다. 좀 덜 열심히 하기 위해 이만 연재를 마친다. 그러나 요즘 나의 글은 <주부 공감> 아닌 것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주부에서 벗어나는 날 비로소 나로 더욱 거듭날 수 있을 테다. 그런데 삶과 글은 늘 함께 가니 그것이 가까운 시일 안에 가능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바짝 들고 반짝이는 눈빛으로 늘 먼 곳을 바라보며 탐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이의 반짝이는 눈빛을 늘 기억하는 주부, 엄마, 내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