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은 3월 1일이다. 새삼 3월의 첫날이라는 걸 알아냈다. 삼일절엔 만세를 부른다. 유관순 누나가 부르는 만세는 대한 독립 만세다. 삼일절에 주부는 미리 만세를 불렀다. 개학 만세!
4단 합체로 완성되었던 방학이 드디어 마무리되었다.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억압의 시절이 시작되는 것일까? 절대 그런 게 아니다. 큰 그림을 봐야 한다.
얘들아. 절대 엄마가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는 게 아니란다.
유관순 누나도 주부도 아이들도 독립을 원한다. 우리는 독립을 위해 한 길을 걷고 있다. 절대 개학의 즐거움에 취해 막말을 내뱉는 것이 아니다. 주부와 아이의 꿈은 같다. 독립 만세. 나는 개학 만세를 부른다. 아이는 먼 훗날 학교로부터 독립, 가정으로부터 독립해 스스로 설 수 있는 미래의 독립을 준비하는 게 다를 뿐이다. 우리는 모두 개개인의 독립을 위해 살아간다.
개학날 아침, 학교 세 곳을 돌아 출근했다. 남편이 고등학생 등교를 전담하기로 했었다. 폭설에 트럭은 파묻혔다. 사륜구동 스노타이어를 장착한 차량은 펑크가 났다. 바람이 서서히 빠지는 차에 아이들을 태울 수 없었다. (무겁다나 뭐라나) 남편은 바퀴를 고치러 이른 아침에 먼저 나갔다. 아이들 넷은 그렇게 개학 첫날부터 내 차를 타고 간다. 맞다. 나는 주부이기도 하고 기사이기도 했었다. 방학 동안 잊고 있었던 또 하나의 역할, 나는 등하교 기사 님이다.
아이들 넷이 한 차에 타면 신경전이 시작된다. 막내 딸아이가 신발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새 신발장이 어디인지 물었다. 큰아이는 그런 막내 동생이 도대체 이해가 안 간다며 짜증을 낸다. 민감도 100퍼센트 고등학생이 되는 첫날이니 이해는 한다만. ‘아들아 내일부터는 아빠 차를 타고 가라.’ 막내에게 실내화와 신발장에 대해 5회 반복학습을 시켰다. “신발을 들고 교실로 찾아가. 선생님께 물어보고 신발장에 신발을 넣어. 알았지? “ 그 후 우리에게 평화가 찾아왔다.
아이들은 대부분 울상이지만 설렘, 기대, 긴장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둘째를 중학교 근처에 내려줬다. 셋째와 넷째를 초등학교 근처에 내려줬다. 보도블록이 쭉 깔린 인도까지 데려다줬다. 막내를 교문까지 안 데려준 건 처음이다. 첫째를 고등학교 교문 근처에 내려줬다. 입학식은 알아서 하겠지? 버스 타기 연습도 했으니 완벽하다.
나도 독립 만세! 너희도 독립 연습이야!
새 학기 시작이다. 야호!
‘얘들아, 엄마가 너무 좋아한다고 서운해 말아라. 너희도 다가오는 앞날, 너희의 독립이 기쁠 테니. 엄마는 아주 사소한 개학이라는 독립이잖니. 완전한 독립도 아니고 반나절 독립인데 이해해 주렴. ’
그리고 방학 때보다 일찍 가게로 출근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두 잔을 뽑아 남편과 나란히 앉았다. 옆에 앉은 남편은 마트 세일을 한다며 주문하느라 바빴다. 장보기가 이렇게 쉽다니! 파도, 양파도, 마늘도, 계란도 주문을 부탁했다. 커피를 홀짝이며 입으로 장보기를 시키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도란도란 여유로운 부부의 커피타임이었다.
삶의 여유는 학교로부터부터 시작된다.
학교는 감사다.
밥도 주는 학교는 더욱 감사다.
맛있는 밥을 주는 학교는 정말 최고다.
학교는 부모가 만든 최고의 휴식처가 아닐까.
학교에 잘 가 준 아이들에게 고맙다.
학교 밥을 잘 먹어주는 우리 아이들이 정말 최고다.
아이들의 하교 시간에 눈과 비가 섞여 내렸다. 찬 비를 맞고 감기 들까 걱정이 되었다. 둘째가 젖은 머리와 젖은 옷을 걸치고 제일 먼저 돌아왔다. 우산을 안 들고 학원까지 걸어갈 꼬마들이 걱정되어 교문에서 커다란 우산을 들고 기웃거렸다. 그리고 교문을 거쳐 현관 앞으로 가 꼬마들에게 우산을 씌웠다.
아이들 대부분이 우산이 없었다. 개중 몇몇만 우산을 쓰고 간다. 그리고 현관 앞에서 멈춘 아이들은 하늘을 보며 선택했다. 비를 맞고 갈 것인지, 모자를 쓸 것인지, 행복나눔실에 가서 우산을 빌릴 것인지. 어떤 아이는 가방에서 미니 우산을 꺼내 썼다.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당장 우산을 시켰다. 가방에 들어가는 미니 사이즈로 네 개 시켰다. 자주 사서 자주 잃어버리는 우산이다. 작으면 더욱 자주 잃어버리고 오는 우산이다. 그러나 아이들 스스로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늘 내가 도와줄 수 없다. 아이 스스로 차가운 겨울비를 맞을 것인지 우산을 쓸 것인지 선택할 수 있게 도와주자. 그것이 부모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아이가 비를 맞는다면, 감기에 걸린다면 나도 아이도 아프겠지. 그러나 우산은 늘 내가 들고 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제는 손을 놓아줄 때다.
하늘이 끄물끄물한 날에는 작은 우산을 가방에 넣어줘야겠다. 우산의 무게를 감당하고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도 내 아이의 몫이다.
우리는 스스로 서고자 하는 사람이다. 주부는 스스로 홀로 서야 한다. 그리고 주부는 아이의 홀로서기 또한 도와야 하는 사람이다. 아이의 독립을 위해 우산을 씌워주지 말자. 아이의 독립을 위해 손을 놓자.
아이의 독립을 도와주는 학교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