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던 많은 욕구와 결핍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따뜻함, 돌봄, 인정, 소유, 의존, 수용, 이해, 친밀, 복수...
자식에게는 더 강하고 깊은 심리정서적 반응이 일어난다.
그래서 부모가 된 아이는 자식에게서 자신을 보고, 부모를 보고, 악을 본다.
어리고 무력한 사랑스러움 덩어리인 자식에게서 자신을 보지 않기 위해, 부모를 보지 않기 위해,
자식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 위해 매 순간을 깨어있으려고 노력을 해야만 했다.
내가 이 아이에게 어떻게 해줘야 하는지를 전혀 모른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을 만큼 아이는 낯설고 성스러운 존재였다.
동물들은 아무것도 배우지 않아도, 태어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어도 자식을 낳으면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지 저절로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임신을 알고부터 계속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나다를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엄마가 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임신과 출산 책을 사서 보고 또 보면서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었다. 병원에 늦지 않게 내 몸의 신호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책을 보고 배웠으며, 나머지는 의료기관에 맡기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고는 무엇을 먹을 수 있는지, 어떻게 안아줘야 하는지, 어떻게 자라는지 다 책을 보고 배웠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지만 유일하게 자손을 번식해서 성장시키는 법을 잊어버린 존재가 된 것 같아 우스웠다. 분명 인류가 존재했다고 하는 그 먼 옛날 척박한 환경에서도 지금 보자 부족한 인지능력으로도(인지가 부족해서 더 잘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 인간은 생존하고 번식을 해왔는데, 지금의 나는 병원 가는 날짜만을 마치 부적처럼 소중하게 의지하게 된 것이다.
어찌 됐든 아이를 지키고 싶었다. 내 몸 안에서 다른 존재가 자란다는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얼떨떨한 나 자신이 혼란스러웠지만 그래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아이를 지키고 싶었다.
그것은 비단 무사히 출산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아이가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행복한 사람으로 삶을 살아가는 태도를 가진 성숙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게 키우고 싶었다. 최소한 아이의 마음에 엄마가, 집이 상처가 되어 아이의 힘을 뺐는 존재가 되지는 않게 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얘기하는 성취적인 면에서는 조금 뒤떨어질지 몰라도 갖고 태어난 자신의 역량은 발휘할 수 있을 만큼만은 건강한 사람으로 키워주고 싶었다.
나처럼 마음속에서 울부짖느라 이미 지쳐버리고, 집과 부모를 생각하면 우울해지고, 그 상처를 곱씹으며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어렵고, 아프고, 헤매고, 외로울 때 기댈 곳 없는 혼자라는 느낌으로 세상과 맞서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고 싶었다.
이미 온전한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내가 망치지 않게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거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읽고 다큐멘터리를 봤다.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을 포기하고 아이에게 에너지와 시간을 집중했다. 다 잘하고 싶은 것은 욕심일 뿐, 실제로 내가 다른 것들도 잘 해내기 위해 애를 쓰다 보면 아이에게 좋은 양육을 할 에너지와 정신적인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다 포기했다.
집안일도 대충 할 수 있을 만큼만 하고, 내 일은 우선 나중으로 생각했다. 아이가 세상에 나온 지 3년이 되는 시간만큼은 아이의 성장에 집중했다. 하지만 나의 부족함을 너무나 알기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아이에게 좋은 엄마가 되는 것 말고는 다 포기했다. 내 선택은 내 아이였고, 거기에만 집중했다.
나는 지키고 싶었다.
나로 인해 다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