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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우소소 Sep 26. 2024

사랑하는 날

늦도록 이어진 무더위를 잠재우려는 듯했다.

바다 여행을 가기로 한 날, 거센 빗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쉴 새 없이 내리는 폭우는 9월이 넘도록 떠나지 않던 여름을 한발 물러서게 했다. 기쁨과 혼란이 공존하는 아침이었다. 장시간 이동해야 하는 우리에게 갑자기 다가온 가을은 좋은 타이밍이 아니었기에. 마냥 한 가지 옷을 고집하는 날씨가 아니었다. 선명한 파란빛 띠다가도, 무채색의 옷으로 갈아입기를 반복했다. 하늘이 뚫릴 것처럼 내렸던 비는 이내 잦아들었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햇살이 들어온다. 이토록 변화무쌍한 날씨를 헤쳐가며 목적지에 도달한 우리였다.


서로를 둘러싼 풍경이 밤바다로 변했다. 길가에는 온통 귀뚜라미 소리가 가득했다. 자연의 소리에 맞춰 작은 스파클라 폭죽을 흔드는 일. 그것만으로 이곳에 온 이유는 충분했다. 돌고 돌아 맞이한 가을의 시작점에서 보내왔던 계절을 되새긴다. 같은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꽤 큰 안정을 주는구나 싶어, 그의 얼굴을 본다. 오늘이 다시 한 때가 되기까지, 너와 나는 또 어떤 날들을 헤쳐 나가게 될까.



벌써 세 번째 사랑니를 다. 언제 뽑아도 밀려오는 고통은 익숙하지 않다. 처음에는 그 이름에 의문이 들었다. 왜 하필 어울리지 않는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어버린 건지. 아마 사랑의 수많은 의미 중 '인내'라는 표현을 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자라날수록 겪게 되는 성장통도, 보내버리는 순간 찾아오는 아픔도 그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으니.


아픔이 가시기까지 오롯이 혼자 견뎌야 하는 시간. 괜스레 투정을 부리고 싶어졌다. 어린아이처럼 너무 아프다고 신호를 보내고 만다. 마침, 그에게서 2번의 전화가 걸려 왔다. 타이밍을 놓쳐 받지 못한 전화에 늦은 답변을 한다.

"있잖아, 아까 걱정돼서 전화했어?"

"응. 아픈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나도 알고 있다. 누군가의 아픔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얼마나 힘든지. 하루빨리 상처가 아물길 바라는 마음일 테다. 그 마음이 전해졌기 때문일까, 아픈 건 괜찮냐는 사소한 첫마디를 듣고 웃음이 새어 나온다. 아파하면서도, 머물고 있던 사랑에 웃음 짓는 나였다.



그리고 곧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본다. 나에게 있어 사랑은 희생이었다. 그래서 그럴까, 조금 어려운 의미로 정의가 내려진 것 같았다.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으면서도 맘속 깊은 곳에는 불안이 존재했다. 사랑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도 기다림이 필요했다. 아마 오랫동안 자리해 왔던 의미를 바꾸고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일까. 사랑의 다양한 면을 겁내지 않고 마주하고 싶어졌다. 어떨 때는 비가 올 것 같다가도 금세 햇살이 비추는 사랑. 누군가의 희생 없이 이룰 수 없지만, 그보다 함께 할 날들에 더 큰 마음을 두는 사랑. 변수를 뚫고 도달한 초가을의 바다처럼, 한적하고 고요한 밤에 비춘 불빛처럼, 곁을 지켜주는 사랑. 그렇게 사랑하는 날에 새로운 의미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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